끄적2009. 7. 29. 01:52

쌍용차 평택 공장에 공권력투입을 비판하는 전국노동자범국민대회가 지난 7 25일 평택역 광장에서 열렸다. 시민, 대학생, 민주노총 등 1만여 군중은 해고는 살인이다. 정리해고 분쇄하자.’ 와 같은 구호를 통해 쌍용차 사태는 공권력 투입이 아니라 공적자금 투입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외쳤다. 이날 무대에 선 연사 중에는 용산 참사의 희생자 이성수 열사의 부인과, 공장 안에서 물도, 전기도 없이 싸우고 있는 쌍용차 노동자의 가족도 있었다.


두 시간 가량 진행된 대회가 끝난 뒤, 쌍용차 노동자에게 전해질 물을 실은 차량을 앞세우고 거리 행진이 시작됐다. 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은 평택 역 앞 시내를 통과해 공장으로 향했다. 평택 시민들은 무더운 날씨에도 거리를 가득 메운 행렬에 응원을 하기도 하고 참가자들이 나눠주는 홍보물을 관심깊게 읽어보기도 했다.


시민, 대학생, 민주노총 등 1만 여명이 평택역 광장에서 열린 범국민대회에 참가했다.


'해고는 살인이다. 정리해고 철회하라.' 출산을 앞둔 쌍용자동차 가족대책위원회 어머니.


함께살자. 제발 좀.

거리 행진에 나선 범국민대회 참가자들.


거리 행진에 나선 범국민대회 참가자들.

한 시간 반 가량의 행진을 마치고 6 20분 경, 쌍용차 공장이 보이는 지점에 시위대가 도착하자, 경찰은 살수차와 차단막으로 공장으로 향하는 진입로를 봉쇄하고 대치했다. 시위대는 보도블럭을 걷어내어 투석전을 준비했다.

잠시 동안의 대치를 끝내고 투석전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경찰은 살수를 시작하며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는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도 여러 노동자가 연행되었다.

 

쌍용차 공장으로 진입하는 도로를 막고 있는 경찰. 도로교통법 위반.


살수를 시작하며 진압에 들어갔다.

공격을 시작하는 경찰. 가운데에 채증을 위한 캠코더가 보인다. 불법채증.


연행되는 노동자. 경찰은 시민의 혁대를 잡아 끄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시민이 일군 텃밭에 까지 뛰어들어가 시민을 연행하고 있다. 식량위기.


한참을 밀려난 시위대는 다시 한번 대오를 정비하고 투석전을 시작했으나 다시 한번 경찰에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시위대가 인근 아파트 쪽으로 달아났고 그들을 쫓아 경찰이 시민이 일궈놓은 텃밭을 가로질러 아파트 단지 내부로 진입하기도 했다.


다시 한번 대치상황, 대오를 정비하고 있는 시위대에게 경찰은 헬기를 동원해 최루액을 담은 비닐 봉지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스티로폼도 녹이는 그 최루액 말이다. 최루액이 떨어지자 모여있던 시위대는 일시적으로 그 자리를 피했다가 다시 모이기를 수 차례, 다시 한 번 경찰의 진압이 시작됐다.

 

텃밭을 가로질러 시위대를 쫓아가는 경찰.


인근 아파트로도 쫓아 들어갔다.


공중에서 최루액을 담은 봉지를 떨어뜨렸던 경찰 헬기.


최루액을 담은 비닐 봉지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다.


시위대가 무리지어 있는 곳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행히 몸을 피했다.


공중에서 경찰이 떨어뜨린 최루액을 담은 비닐 봉지를 촬영하고 있는 취재진.
냄새를 맡아보니 최루액이 아닌 물인 듯 했다. 최루액이 다 떨어졌을까?


또 다시 여러 참가자가 연행되었다. 연행 과정에서 노동자가 저항하자 경찰이 곤봉으로 위협을 가하는 장면도 목격되었다. (이는 모두 인권침해감시단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인근에 모여있던 시민들이 일부 흥분하여 경찰과 잠시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진압 과정에서 상처를 입어 호흡이 곤란해진 노동자도 목격되었다. 그는 취재진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물을 먹이려 하자 구토를 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모여들어 빨리 119를 불러라’, ‘너희들은 부모도 없느냐는 등 경찰을 향해 소리를 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한 경찰은 캠코더를 들이대고 촬영을 하고 있었고, 한 시민이 채증하지 마세요. 그거 불법이잖아요.’라며 얘기했지만 해당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을 계속했다. 시민과 경찰의 실랑이가 두어차례 벌어졌고, 이후 앰뷸런스가 도착하자 부상을 입은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인권침해감시단에서 한 사람이 동승하였다. 부상자를 앰뷸런스에 태우는 과정에서 기자를 왜 때리느냐라는 흥분된 목소리도 여러 차례 들렸다.

 

곤봉으로 연행되는 시민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권침해감시단에서 많은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시민들을 향해 직접 분사하고 있는 살수차.


연행하는 과정에서 주변 인도에 있던 시민들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진압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시민. 옆에 놓여있는 소화기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부상자에 대한 응급조치가 빨리 취해지지 않자 흥분한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그 자리에 캠코더를 들이미는 경찰.
(초상권 보호차원에서 경찰관 얼굴에 블러처리.)


동일한 경관이 부상을 입은 시민이 앰뷸런스에 태워지는 과정에 계속해서 촬영을 하고 있다. (역시 블러 처리)


법원 사거리까지 밀려나 대오를 정비하고 있던 시위대는 오후 8시에 즈음해, 쇠파이프를 든 일부 시위대가 다시 쌍용차 방향으로 행진하였으나 30분 뒤 다시 법원 사거리로 돌아왔다. 지도부가 다음 행보를 논의하는 동안 시위대는 법원 사거리에 늘어앉아 연좌시위에 돌입했다. 일부 대학생 참가자와 시민들이 밤이 늦어 돌아가자 마이크를 든 민주노총의 누군가가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 분위기인데라는 말을 했고, 이에 흥분한 참가자들이 말을 제대로 하라.’며 중앙으로 몰려들어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촬영을 시도했으나 제지당했다.)


한 시간 가량을 그렇게 보내고, 지도부에서 다시 한번 쌍용차 방면으로 가기로 결정이 된 듯, 쇠파이프와 죽봉으로 무장한 선봉을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대오의 상당부분이 빠져버렸고 약간의 내부 분란까지 겪은 상황에서 시위대는 더 이상 행진하지 못하고 SK 주유소 인근에서 10시에 해산했다.



Posted by Pavel
Juventus/History2009. 7. 28. 19:33

       Club's history


Before and after World War II


Juve win two Italian Cups. 1947, the Avvocato Giovanni Agnelli becomes Chairman.

 

득점 기계 Gabetto

  1935-36 시즌, 유베는 챔피언 Bologna에 승점 5점 뒤진 리그 5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미 유베는 골키퍼 Valinasso, 풀백 Foni,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깰 수 없는 Monti를 보유하고 있는 데에 더해, 이 시즌 20골을 넣은 수퍼 Gabetto가 등장했다.

  그 다음 시즌에도 5위를 했지만 Borel II가 18골, 어린 Gabetto가 17골을 넣었다. Amoretti와 Foni, Rava가 여전히 강력한 디펜스 트리오를 만들고 있었다. 비안코네리는 1937-38시즌, 다시 한번 리그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Ambrosiana Inter에 뒤진 2위로 시즌을 끝냈다. 하지만 이 시즌, 유베는 결승전에서 Torino를 꺾고 첫 번째 이탈리안 컵을 차지했다.

 

Parola의 등장

  1938-39 시즌, 유벤투스는 여전히 Depetrini, Foni, Gabetto와 같은 훌륭한 선수들이 있었지만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바로 다음 시즌에는, Ambrosiana Inter와 Bologna에 밀려 3위를 차지했다. 한가지 긍정적인 점은 아주 어린 중앙 수비수가 시즌 후반기에 데뷔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Carlo Parola였다. 1940-41 시즌, 팀은 다시 6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다음 해, AC Milan을 꺾고 두 번째 이탈리안 컵을 따냈다. 알바니아인 Lustha가 Gabetto와 함께 공격을 이끌었다. 이탈리아가 세계 제 2차 대전에 뛰어들면서 리그에게는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리그가 중단되지는 않았다. 당시 유벤투스는 늙기는 했지만 여전히 클래스를 유지하고 있는 Giuseppe Meazza를 데리고 있었다. 하지만 Gabetto가 Torino로 팀을 옮겨버렸다. 이 시즌 유벤투스는 Torino와 Livorno(놀랍게도!!!)에 밀려 3위를 차지했다.

 

전시(戰時)의 리그

  전쟁이 가장 심해졌던 시기에도 축구는 계속되었다.

  1944년, 유벤투스는 지역 토너먼트에 다른 두 팀과 함께 참가했다. 그 중에 한 팀은 당시 유벤투스의 회장인 Piero Dusio가 소유하고 있던 자동차 공장 Cisitalia였다. 유벤투스는 Sentimenti IV, Rava, Depetrini, Parola, Sentimenti III, Borel II가 뛰었고, Foni, Varglien II, 알바니아인 Lustha, Santacroce가 Cisitalia에서 플레이했다. 경기 중에 스탠드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토너먼트가 중단되었다.

 

Gianni Agnelli 회장과 Boniperti의 등장

  1945년 10월 14일, 마침내 리그가 다시 시작되었고, 곧장 더비 경기가 벌어졌다. Torino는 이미 'Grande Torino'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유베도 이미 강했고 2-1로 승리했다. 그 이후는 두 팀 간의 치열한 경쟁이었다. 하지만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Torino는 Livorno를 꺾었지만 유베는 Napoli를 상대로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타이틀은 Granata가 차지했다. 이 해 여름, 팀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1947년 7월 22일,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Avvocato' Gianni Agnelli가 회장이 되었다. (Avvocato는 the lawyer라는 뜻입니다.) 구단의 새 프론트가 맺은 첫 번째 중요한 계약도 1947년에 있었다. 그 계약은 Barengo의 꼬마, Giampiero Boniperti였다.(이때 그의 나이는 열 아홉이었습니다.) 유베는 이미 다른 포지션에 Parola와 Sentimenti IV라는 두 명의 스타 플레이어를 데리고 있었다. 그의 등장으로 드디어 팀이 그렇게 오랫동안 찾았던 센터 포워드가 합류하게 됐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어린 선수, 덩치는 작지만 기술이 뛰어났던 Muccinelli와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됐다. 1948년 여름, 유베는 덴마크 출신의 체격 조건이 좋은 포워드를 한 명 사왔다. 그의 이름은 John Hansen. 그는 아주 파워풀했고 헤딩 경합이 아주 좋았다.

 

HEADQUATERS

1933-43 Via Bogino 12

1943-47 Corso IV Novembre 151

 

GROUND

1933-90 Corso Sebastopoli Stadium


       Chairmen


 

1935-36 Enrico Craveri-Giovanni Mazzonis

  Enrico Craveri, 비안코네리 프론트였던 그는 Edoardo Agnelli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회장이 되었다. 그는 1908년부터 1912년까지 유벤투스의 선수였으며 나중에 Edoardo Agnelli의 오른팔이 되었던 Giovanni Mazzonis의 절친한 친구였다.

 

1936-41 Emilio de la Forest de Divonne

  토리노의 귀족이면서 파시스트 정권과 친분이 있었던 그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은 Edoardo Agnelli의 뒤를 이을 사람은 그만큼 명성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클럽의 생각을 채워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1941년까지 회장직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인 클럽 운영은 경험이 있었던 Craveri, Mazzonis, Remmert가 맡아서 했다.

 

1941-47 Piero Dusio

  그는 젊은 시절,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유벤투스에서 오른쪽 윙어를 했던 제법 괜찮은 축구선수였다. 은퇴한 뒤에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고 Cisitalia의 오너로서 전쟁이 벌어지던 기간 동안 유벤투스가 일정한 수입을 올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1947년, 그는 Giovanni Agnelli가 회장이 되도록 설득했다.

 

1947-54 Giovanni Agnelli

  스물 여섯에 불과했던 1947년 7월 22일, 그는 아버지, Edoardo와 똑같이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Giovanni가 회장이었던 기간도 클럽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는 John Hansen, Martino, Praest를 영입한 것 같은 좋은 계약들을 성사시켰다. 그 뿐 아니라 Viola, Bertuccelli, Piccinini와 같은 이탈리아의 어린 재능들에 집중하기도 했다. 그는 유베가 1950년과 52년에 타이틀을 차지했던 Great Juve를 만드는데 전력을 다했다. 'Avvocato'는 1954년 9월 18일, FIAT에서의 일에 더 집중하기 위해 회장에서 물러났다.



       Captains


 

Virginio Rosetta

Luis Monti

Mario Varglien II

Pietro Rava



       Coaches

 


Virginio Rosetta

  축구 선수로서도 전설이었던 그는 선수 겸 감독으로 커리어를 마쳤고 그 이후로는 3년 간(1936년부터 39년까지) 팀을 감독했다. 그는 축구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경험과 지식들을 잘 이용했다. 감독에서 물러난 뒤에는 클럽의 스카우터로 남았고 Parola와 Boniperti같은 젊은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Umberto Caligaris

  1938년 Brescia에서 풀백으로서의 경력을 마감한 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팀 동료였던 Rosetta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유베에 돌아왔다. 그는 좋은 감독이었지만 1940년, 예전에 함께 뛰었던 선수들과의 기념 경기 도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그때 마흔도 채 되지 않았다.

 

Federico Munerati

  그는 열심히 뛰었고, 기술도 있었고, 득점도 많았다. 그래서 1922년부터 33년까지, 11시즌 동안이나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였다. 그 이후에는 유스 팀 감독이 되었고 1940년에 퍼스트 팀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42년 이탈리안 컵을 따냈다.

 

Giovanni Ferrari

  이탈리아 국가대표로서 두 번의 월드컵 우승과 여덟 번의 리그 타이틀. (그 중 다섯 번은 유벤투스와 함께했다.) 포워드로서 그의 경력은 대단하다. 유벤투스에서 그는 자신의 화려한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1960년에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유베의 감독으로 있었던 동안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 한 시즌(1941-42) 만에 물러났다.

 

Felice Borel

  30년대, 유베에서 센터 포워드로 뛰면서 많은 득점을 했던 그는 1942년부터 46년까지의 암울했던 시기, 선수 겸 감독으로 있었다.

 

Renato Cesarini

  1930년부터 35년까지, 리그를 지배했던 5년 간, 그는 유베에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 그리고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서 감독이 되었다. 유베는 그를 잊지 않았고 그를 1946년부터 48년까지, 그리고 1959년, 이렇게 두 번이나 채용했다.

 

William Chalmers

  거드름을 피우기를 좋아했던 영국인인 그는 Cesarini의 자리를 1948년에 이어받았다. 그는 선수들이 호텔에 있든, 기차에 있든, 어디에 있는지는 관계없이 그들을 훈련시키는 변덕을 부렸다. 구단 프런트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이런 미친 짓에 익숙하지 않은 선수들도 그를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 시즌 뒤에 해고됐다.


사진과 텍스트의 출처는 Juventus.com 입니다.
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Posted by Pavel
Juventus/History2009. 7. 23. 16:28
       Club's History

The dream team becomes "Italy's girlfriend"

5회 연속 우승
  Ferrari, Vecchina, Varglien II가 팀에 왔다.
  이 시기는 유벤투스가 1930년부터 35년까지 다섯 번 연속 우승을 차지하면서 '이탈리아의 여자친구'가 된 때이다. 아녤리와 그의 대리인 Baron Giovanni Mazzonis di Pralafera가 경영한 시기, 팀은 점차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29-30 시즌에 시작된, 그룹 하나로 구성된 리그(Serie A)는 축구 선수들에게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그 시즌, 이미 스타였던 Varglien I과 Caligaris에 더해서 Mumo Orsi와 Renato Cesarini가 팀에 합류했다. 다음 해에는 포워드 Giovanni Ferrari, 센터 포워드 Vecchina와 하프백 Varglien II가 들어왔다. 이미 전설적인 수비 트리오 (Combi-Rosetta-Caligaris)를 보유하고 있던 유베는, 당시 리그를 지배하고 있던 Ambrosiana Inter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가공할 공격진 (Munerati-Cesarini-Vecchina-Ferrari-Orsi)을 갖추게 됐다.
  유베는 곧 리그의 정점에 서게 됐다. 봄에 반짝했던 로마에게 일격(1931년 3월 15일, 로마에서 0-5로 패)을 당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폼을 계속 유지, 토리노에서 복수를 해주기도 했다. 인터 밀란에게도 승리를 거두면서 우승을 못 박았다.

수비의 거인, Monti
  다음 시즌을 위해서 Carcano에게 필요한 것은 거의 없었다. 새롭게 사인을 한 선수는 경험많은 하프백 Lisito Monti 그의 곧은 성격과 굳은 의지로 Monti는 자신이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수비수임을 보여주었다. 시즌 초기에는 모든 팀들이 유베를 꺾으려고만 해서 작은 문제들이 몇 가지 나타났다. 하지만 그 문제들은 곧 해결되었고 선수들은 다시 폼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했다. Orsi와 그 동료들이 Ambrosiana Inter를 박살냈던 1932년 1월 17일 경기가 기억할 만하다. 1932년 3월 6일, 로마를 7-1로 꺾은 뒤부터는 탄탄대로였다.
  5월 1일, Corso Marsiglia 경기장에서 볼로냐를 3-2로 꺾었다. 이 경기로 비안코네리는 2연속 스쿠데토를 차지했다. Orsi는 20골로 득점 1위를 차지했고 Ferrari, Vecchina, Munerati도 각각 17골, 15골 14골로 이름을 올렸다.

Borel II와 Bertolini
  1932년 여름, 유벤투스는 하프백 Bertolini와 윙어 Sernagiotto를 데려왔다. 하지만 새로운 선수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선수는 유스팀에서 올라왔다. 젊은 포워드 Felice Placido "Farfallino" Borel이었다. (Farfallino는 나비 넥타이라는 뜻이라고 하는군요.) 그는 늘 안쪽 포워드(inside forward)로 플레이했지만 Vecchina가 부상당했을 때에는 센터 포워드로 뛰기도 했다.
  1932-33 시즌의 중요한 골들은 거의 Borel이 득점했다. 유베는 승점 54점으로 Ambrosiana에게 8점 앞선 1위를 차지했다. 28경기에서 29골을 넣은 Borel에게는 최고의 시즌이었다.

새 경기장과 더 많은 스쿠데토
  4회 연속 스쿠데토를 차지한 34년에도 Borel의 활약은 계속되었고, 그는 31골을 넣었다. 유난히 좋은 시즌을 보냈던 Ambrosiana에게 승점 4점을 앞섰다. 유벤투스도 그들을 꺾지는 못했다는 사실이 이번 스쿠데토를 더욱 값지게 했다. 1934년 2월부터 팀은 새로운 스타디움 Stadio Comunale에서 경기를 할 수 있게 됐다.
  유베는 35년에도 스쿠데토를 차지해, 5연속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 시즌에는 많은 선수들이 국가 대표팀에서 뛰고 싶다는 욕심에 팀을 떠났다. (1934년은 이탈리아 월드컵이 있었고, 이탈리아는 우승으로 줄 리메 컵을 차지했습니다.) Combi는 이미 은퇴를 결정, 5회 연속 우승의 마지막 시즌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젊은 피 Foni와 Serantoni가 팀과 함께 했습니다.

HEADQUARTERS
1922-33 Corso Marsiglia
1933-43 Via Bogino 12

GROUND
1922-33 Corso Marsiglia
1933-90 Stadio C.so Sebastopoli


       Chairmen


Edoardo Agnelli (1892 - 1935)


       Captains


1930-35 Viri Rosetta


       Coaches


1930-34 Carlo Carcano
  Masnago에서 1891년 출생. 센터 하프백으로 Alessandria에서 경력을 쌓았고 이탈리아 국가대표로도 뛰었다. 그는 감독을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상태에서 유벤투스를 맡았다. 그는 팀에 몸담고 있는 많은 스타선수들 간의 경쟁과 갈등을 조절하는데 뛰어났다. 그는 '전설적인 5년', 즉 31, 32, 33, 34년의 우승과 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는 1934년 가을에 갑자기 교체되었다. 그래서 다섯 번째 연속 우승은 20년대, 유벤투스의 중요한 선수였던 Carlo Bigatto가 감독이 되어 대신했다.

1934-35 Carlo Carcano, from 1934.12.16  Carlo Bigatto-Benedetto Gola

사진과 텍스트의 출처는 Juventus.com 입니다.
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Posted by Pav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