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ventus/History2009.09.16 01:03

       Club's History


1969-70, Boniperti Managing Director, 72, 73 titles with Vycpalek, 75 title with Parola


Carniglia, Rabitti와 Picchi

  1969년, Heriberto Herrera의 시기는 끝나고 Luis Carniglia가 새롭게 유벤투스의 사령탑에 올랐다. 풀백 Marchetti, 센터백 Morini, 하프백 Furino, 포워드 Roberto Vieri와 스트라이커 Lamberto Leonardi가 영입되었다. 팀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몇몇 전술적, 기술적인 문제들이 있었고, 이 문제들을 잘 해결하지 못했다. 클럽 운영에 있어서도 새로운 방향이 제시될 필요가 있었다. Ercole Rabitti가 Carniglia의 자리를 대신하는 동안, Boniperti가 Managing Director로, Italo Allodi가 General Manager로 취임했다. 팀은 스스로를 다잡고 실력을 다시 발휘하며, 8연승으로 Cagliari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Gigi Riva가 지휘하던 Cagliari는 1위를 계속 유지했고 스쿠데토를 따내는 데에는 토리노에서 유벤투스와 비기기만 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스쿠데토를 따냈다. 팀은 1970년 광범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나이가 좀 있었던 선수들 중에서는 Haller와 Salvadore만이 팀에 남았고 클럽은 Spinosi, Capello와 Landini와 같은 젊은 선수들을 영입했다. 그리고 Franco Causio, Roberto Bettega가 Palermo와 Varese에서 임대복귀했다. Armando Picchi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그의 지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시즌 전반기와 후반기의 유베는 완전히 달랐다. 시즌 전반기에는 기복이 심했지만, 후반기에는 다시 궤도에 올랐다. 특히 유럽무대에서 그랬다. Vycpalek 감독과 함께, 팀은 서서히 리그 테이블을 올라갔고 Fairs 컵에서는 결승전에서 Leeds United를 만나 준우승을 차지했다.

 

Vycpalek의 타이틀

  1971-72 시즌 4라운드. Bettega와 Causio의 활약에 힘입어 San Siro에서 AC Milan을 4-1로 꺾었던 것이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하지만 팀에서 가장 치명적인 스코어러 Bettega가 통증을 느꼈고 1월에는 스쿼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리그 1위를 수성하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봄에는 AC Milan과 Cagliari가 1위를 위협하는 가운데, 더비 경기에서 Giagnoni의 Torino에게 역전패를 당했다. 하지만 유베는 Causio의 해트트릭으로 Inter Milan을 꺾고, Cagliari도 꺾으면서 곧바로 1위를 다시 되찾았다. 14번째 스쿠데토를 따냈다.

  다음 시즌, 이미 전설적인 골키퍼였던 Dino Zoff와 Josè Altafini가 Napoli에서 영입되었다. 1972-73 시즌, 출발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팀의 고참이었던 Altafini의 노력으로 유베는 다시 테이블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4월, AC Milan에는 5점, Lazio에는 3점 뒤져있었다. 유러피언 컵에서는 Olympique Marseille, Magdebrug, Ujpest를 만났고, 리그도 병행했기 때문에 유베의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유베는 그 이후로 시즌 마지막 날까지 모든 리그 경기를 승리했다. 결정의 날. 유베와 Lazio에 승점 1점을 앞서 있었던 AC Milan은 Verona에서 최악의 결과를 맞았다. 그리고 Lazio도 Napoli에 패했다. 반면에 유베는 Cuccureddu의 골로 Roma에 역전승을 거두었다. 극적으로 15번째 스쿠데토를 따낸 것이다. 리그 우승을 축하한 뒤,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Cruiff의 Ajax를 맞아 패했다.

 

Parola의 귀환

  1973-74 시즌, Altafini는 여전히 강한 신뢰를 받고 있었고 수비수 Claudio Gentile이 Varese에서 영입되었다. 하지만 시즌의 시작은 좋지 않았다. 유러피언 컵에서도 좋지 못했다. 유베는 Dynamo Dresden에게 패하고 말았다. Lazio의 플레이는 절정이었고 유베는 가끔 그들이 어떤 팀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시즌 말미에는 괜찮은 결과를 냈지만 2위로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해, 또 한번 선두에 올랐다. Carletto Parola가 팀을 떠난지 15년 만에, 유베에 돌아왔다. Damiani와 Scirea가 새로이 영입되었다. 아주 멋진 시즌이었다. 유베는 Napoli에서 6-2로 승리를 거두었고, Altafini의 노력에 힘입어 봄에는 토리노에서도 그들을 꺾었다. 5월 18일, 스쿠데토 획득을 자축하듯 Vicenza를 5-0으로 꺾었다. 1975-76 시즌, 시작은 지난 시즌과 같았다. 유베가 1위를 달렸고 나머지 팀들이 뒤쫓아 왔다. 그 중에서 Radice가 이끄는 Torino가 특별히 강한 상대였다. 어린 Tardelli와 예비로 센터 포워드 Bobo Gori가 영입되었다. 시즌 후반기가 절반 정도 지난 상황에서, 유베는 Granata(Torino의 별명)에 승점 5점 앞서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가 잘못되기 시작했고 유베는 Pulici와 Graziani의 Torino에게 역전을 허용하고 말았다.

 

HEADQUARTERS

1964-85 Galleria San Federico 54

 

GROUND

1933-90 Corso Sebastopoli Stadium

 

 

       Chairmen



1962-71 Vittore Catella

 

1971-90 Giampiero Boniperti

  1969년 Managing Director에 취임했다. 유벤투스의 아이콘이었던 그는, Vittore Catella의 뒤를 이어 1971년 7월 13일 회장이 되었다. 그의 재직 기간 동안 유베는 이탈리아 내에서, 세계 무대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1990년 2월 5일 사임했다. 그와 함께 유베는 72, 73, 75, 77, 78, 81, 82, 84, 86년 스쿠데토를 따냈고 유럽무대에서도 다수의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축구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선수들과도 믿음을 담보로 한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믿음을 바탕으로 그는 선수들에게 백지 계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런 시기였다.

 

 

Captains



1965-70 Ernesto Castano

1970-74 Sandro Salvadore

1974-84 Giuseppe Furino

 

 

       Coaches



1969-70 Luis Carniglia

  1969년 여름, Luis Carniglia는 Heriberto Herrera의 자리를 대신해 팀에 합류했다. 풀백 Marchetti, 센터백 Morini, 하프백 Furino, 포워드 Roberto Vieri와 스트라이커 Lamberto Leonardi를 영입했다. 출발은 좋지 않았다. Carniglia는 스타플레이어들을 과도하게 아껴서 그들을 훈련에서 제외하기 일쑤였다. 반면에 자신이 보기에 기술적으로 보통 수준이라고 판단되는 Furino와 Morini 같은 선수들에게는 차갑게 대했다. 기자들은 그를 좋아했지만 그가 일하는 방식은 좀 구식이었다. Palermo에게 4-1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팀은 곧 밥 먹듯이 승점을 잃기 시작했다. 그는 얼마 뒤 경질되었다.

 

1969년 10월 24일부터 Ercole Rabitti

  현명했던 Ercole Rabitti는 Carniglia에 뒤이어서 감독이 되어, Managing Director, Boniperti, General Manager, Italo Allodi와 함께 클럽을 이끌었다. 1969년 10월 24일, 예상했던대로 유베는 다시금 리그 테이블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유베는, 그 당시 리그를 지배했던 Cagliari를 따라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즌에 우승을 향해 달려가기는 이미 너무 늦었다. 여름, 팀에는 대변화가 있었다. 스쿼드는 눈에 띄게 젊은 선수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빌딩 대상에서는 Rabitti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1970-71 Armando Picchi

  1970년 여름. 검증된 젊은 선수 여러 명이 클럽에 영입되었다. 이 열정적인 선수들을 다루기 위해서 유베는, 불과 몇 달 전까지도 뛰어난 선수로 활약했던 Armando Picchi와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불행히도 건강에 문제가 생겨, 자신이 따낸 것이나 다름 없었던 첫 번째 스쿠데토도 들어보지 못했다.









1971년 2월 28일부터 Cestmir Vycpalek

  Boniperti는, 불운했던 Picchi의 뒤를 이어서 자신의 팀 동료이기도 했던, Cesto라는 별명을 가졌던 Cestmir Vycpalek과 계약을 맺었다.


  Vycpalek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살집이 좀 있는 동네 아저씨 같았던 그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팀의 어린 선수들

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Vycpalek은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가끔은 너그러워지기도 했다. 까불기를 좋아했던 Haller 같은 선수가 가끔 그를 화나게도 했지만, 결국 그도 또한 성격을 고치고 동료들과 함께 훈련에 열심히 참가하게 되었다. 1971-72 시즌은 Vycpalek의 것이었다. 어린 Bettega가 득점을 올렸고, 팀의 고참 Salvadore 뒤에서 그를 받쳤다. Cesto는 클럽이 원했던 대로, 팀을 멋지게 조련해냈다. 그의 지휘 아래에서, 팀은 필요하면 화려한 경기를, 또 때로는 결과를 위해 효과적인 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다음 시즌, 팀은 여전히 같은 폼을 유지했다. Zoff가 골대를 지키고 있었고, Altafini가 중요한 골들을 넣었다. 팀 최초의 현대적 의미의 감독이었지만 여전히 축구에 대한 낭만을 갖고 있었던 Vycpalek는 Lazio에게 밀려 아깝게 스쿠데토를 놓친 이후, 팀을 떠났다.

 

1971-74 Cestmir Vycpalek

 

1974-76 Carlo Parola

  실망스러웠던 1973-74 시즌 이후, 클럽에는 변화가 필요했지만 여전히 같은 이상을 갖고 있을 필요도 있었다. 이 일에는 Carlo Parola만큼 적임자가 없었다. 그는 선수로서는 하프백으로 활약하며 전설적인 오버헤드 킥으로 유명했고, 감독으로서는 1961년, Cesarini와 함께 유벤투스에서 스쿠데토를 들었다. 1974년의 유베는 리그에서 단연 최고의 팀이었다.

  Parola는 정말 많은 추억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추억에 빠져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유베는 많은 것을 이뤄냈다. 필요할 때에는 나이가 많았지만 여전히 활약했던 Altafini를 투입해 승리하기도 했다. 1975-76 시즌도 여전히 유베가 리그를 지배했다. 하지만 유러피언 컵에서 Borussia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고, Torino는 리그에서 강하게 위협하고 있었다. 스쿠데토는 확실한 것으로 보였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Granata가 역전하면서, 해피엔딩을 준비했던 Parola는 실망을 안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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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ventus/History2009.09.1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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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and Sivori

Umberto Agnelli Chairman from 1956, tenth title in 1958

1957-58, 승리의 시즌
  Sivori와 Charles가 합류한 유벤투스는 굉장한 팀이 되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Ljubisa Brocic 감독은 Mattrel과 어린 센터 포워드 Nicolè을 영입했다. 1957-58 시즌은 성공적이었다. Boniperti, Sivori, Charles는 시즌 첫 경기부터 특별했다.

  특히 관중들을 열광하게 만든 것은 Charles였다. 열 번째 리그 타이틀을 차지하는 데에는 이 웨일즈인의 공로가 제일 컸다. 그는 28골을 넣었고 Sivori가 22골을 넣었다. 젊은 키퍼 Mattrel도 팀을 놀라게 했다. 1958-59 시즌, 뭔가 좋지 않았다. AC Milan이 강하게 도전해왔고 유베는 잘 막아내지 못했다. 몇 경기에서는 안 좋은 모습도 보였다. Sivori는 예전같이 뛰지 못했고 Charles도 마찬가지였다. 유베는 강한 팀이었지만 AC Milan에 승점 10점이나 뒤진, 4위로 시즌을 마무리해야했다. 하지만 이탈리안 컵을 따내기는 했다.


Cesarini의 귀환

  Renato Cesarini가 1959-60 시즌, 새 감독으로 팀에 합류했다. 그와 함께, Sivori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며 27골을 넣었다. 유베는 다시 한 번 승전고를 울렸다. Fiorentina가 뒤따라왔지만 1959년 11월 8일, 유베는 그들을 토리노에서 3-1로 이겨버렸다. Puppo 감독 아래, 유베에서 한 시즌을 뛰었던, Hamrin의 선취점에 Nicolè 과 Sivori(2골)가 응답했다. 그리고 1960년 1월 10일, San Siro에서 Stacchini and Cervato의 득점에 힘입어, AC Milan도 이겼다. 시즌 후반기는 유벤투스를 위한 것이었다. 1960년 5월 15일, 유벤투스는 AC Milan을 3-1로 꺾으며 시즌을 마무리지었다. Sivori가 두 골을, Boniperti가 한 골을 넣었다. 열한 번째 스쿠데토는 2위 Fiorentina에 8점이나 앞선, 승점 55점이라는 굉장한 기록과 함께 유베가 차지했다.


Inter를 눌러버린 Sivori

  1960-61시즌. 새 감독 Helenio Herara를 영입한 Inter Milan과, Altafini라는 걸출한 스타를 지닌 AC Milan은 시즌 초반에 전 보다 훨씬 더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안코네리는 시즌 전반기를 리그 선두 Inter Milan에 승점 4점 뒤진, 3위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시즌 후반기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더비 경기 승리로 유베는 리그 선두 Inter Milan에 승점 1점 뒤처져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일요일, 마침내 역전에 성공했다. 유베는 Bologna를 꺾었지만 네라쭈리는 AC Milan에 패했다. 4월 16일, 타이틀을 두고 싸우는 양 팀이 Comunale에서 맞붙었다. 하지만 경기는 그라운드에 난입한 팬 때문에 중단되었다. 처음에는 Inter Milan의 2-0 승리로 결정되었지만 나중에 시즌 말미에 재경기를 치르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재경기는 별 의미가 없었다. 이미 유베가 산술적으로 열두번째 스쿠데토를 따냈기 때문이다.


HEADQUARTERS

1947-64 Piazza San Carlo 206


GROUND

1933-90 Corso Sebastopoli Stadium



       Chairmen



1956-62 Umberto Agnelli



       Captains



1954-61 Giampiero Boniperti



       Coaches




1957-58 Ljubisa Brocic

  1911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출생. 그는 이미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사람이었고 4, 5가지 언어를 할 수 있었다. 그는 클럽에 자신의 이력서를 보내 스스로 감독을 맡고 싶다고 제안했다. 클럽의 사람들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람들은 그를 Sivori의 변덕에도 절대 당황하지 않을, 침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 시즌에 타이틀을 따냈지만 바로 다음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 Wiener에게 7-0으로 대패하고 해고되었다.


1958-59 Ljubisa Brocic (59년 3월 29일 부터는 Renato Cesarini-Teaobaldo Depetrini)


1959-60 Renato Cesarini- Carlo Parola

  Renato Cesarini는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유베에서 많은 것을 이뤘다. 40년에 후반에 이어서 다시 한 번, 59-60 시즌, 비안코네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벤치에는 Cesarini와 함께, 유베의 영광을 이끌었던 또 다른 선수였던 Carlo Parola도 있었다.


1960-61 Renato Cesarini (60년 11얼 13일 부터 Carlo Parola, 62년 1월 21일 부터 Gunnar Gren-Carlo Parola와 함께)

  벤치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60-61시즌 이었다. AC Milan에서 뛰었던 Gunnar Gren이 테크니컬 디렉터로 짧은 기간 동안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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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ventus/History2009.09.15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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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vimiento" Years

1961-1969: from Amaral to Heriberto Herrera, with whom Juve win the 1967 title

Boniperti와의 작별과 Amaral의 4-2-4 포메이션

  유벤투스가 열두 번 째 스쿠데토를 따낸 다음 시즌, Charles가 부상에 시달리는 동안 Boniperti는 은퇴를 선언했다. 유베는 유러피언 컵에 집중하고 있었다. 1, 2라운드에서 Panathinaikos와 Partizan Belgrade를 물리쳤지만 그 다음 라운드에는 Real Madrid를 만났다. 한편, Umberto Agnelli는 자신의 사업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회장직에서 물러나야했다. 엔지니어였던 Vittore Catella가 그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다. 1962년 8월, 브라질 출신의 감독 Amaral이 팀에 영입되었고, 4-2-4 포메이션을 쓰는 유베가 등장했다. 미드필더 Luis Del Sol과 수비수 Salvadore가 눈에 띄는 영입이었다. 리그 초반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준비된 센터 포워드 Miranda가 브라질에서 영입되었고, 그의 활약에 힘입어 팀은 리그 테이블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1962년 12월 23일 밀라노에서 유베는 그들이 좋은 팀임을 보여줬지만 Inter가 더 뛰어났다. Jair가 득점해 Inter Milan이 1-0로 승리했다. 유베는 2위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알프스 컵과 Sivori와의 작별

  1963년 여름, 유베의 여름은 완벽에 가까웠다. Gori, Dell'Omodarme와 Menichelli를 영입했고, 스위스에서 알프스 컵을 따내 첫 번째로 국제무대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9월, 여름의 약속은 곧 무너졌다. Amaral이 팀을 떠났고 그의 자리는 Eraldo Monzegli가 대신했다. 그리고 12월 22일,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이전 시즌 우승팀인 Inter Milan을 토리노에서 4-1로 꺾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기적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고 팀은 4위로 시즌을 마무리 했다. 1964년, 파라과이 출신의 Heriberto Herrera가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스쿼드에도 변화가 있었다. 센터 포워드 Nestor Combin이 프랑스에서 영입되었지만 Sivori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Herrera는 모든 선수들에게 공을 가졌든 안 가졌든 많이 움직일 것을 요구했다. 유벤투스는 1965년 8월 29일 로마에서 Inter Milan을 꺾으면서 이탈리안 컵을 차지했다. 1965-66시즌, Sivori가 Napoli로 떠났고, 클럽은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유베는 선두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고 크리스마스 전까지 무패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이후 몇 게임에서 승점을 잃어 결국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13번째 타이틀과 유러피언 컵

  1966년 여름. 센터 포워드 Gigi De Paoli와 윙어 Favalli와 계약을 맺었다. 뿐만 아니라 디펜스는 아주 강했다. 팀은 경기를 잘 치러내고 있었다. Fiorentina와 Napoli를 꺾었고, San Siro에서 Inter Milan과는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시즌 전반기가 끝났을 때, Inter Milan은 유베에 겨우 승점 1점 앞선 선두를 유지하고 있었다. 비안코네리는 Napoli와 Roma를 꺾었다. 하지만 Bologna와 AC Milan에게 패하면서 Inter Milan이 그 사이에 치고나갔다. 유벤투스는 그들을 토리노에서 꺾었지만, 마지막 경기까지 스쿠데토의 향방은 결정되지 않았다. 유베가 Bercellino와 Zigoni의 득점으로 Lazio를 꺾었고, Inter는 Mantova에 0-1로 패하면서 최후에 스쿠데토를 따냈다. 이제 그들에게는 유러피언 컵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클럽은 스쿼드를 충분히 강화하지 못했다. 컵 대회를 시작하기 전 까지 스웨덴 출신의 Magnusson만이 새로이 영입되었다. 때문에 리그에서는 초반에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유러피언 컵에서는 좋은 경기를 보여주면서 Olympiakos와 Bucarest를 꺾었다. 유베는 준결승전에서 독일 챔피언 Eintracht Braunshweig를 만났다. 독일에서 2-3으로 패하고 토리노에서 1-0으로 승리하였다. 베른(Berne)에서 벌어진 결정전에서는 Magnusson의 득점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Eusebio가 건재한 Benfica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리그에서는 여섯 경기에서 다섯 번을 승리했고 유베는 3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1968년 여름, 유베는 Helmut Haller와 어린 Romeo Benetti와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영입은 센터 포워드 Pietro Anastasi를 Varese에서 영입한 것이었다. 이번 시즌도 별다른 일이 없었다. 유벤투스는 11월까지는 선두권을 바짝 뒤쫓고 있었고 그 뒤에는 AC Milan, Fiorentina와 Cagliari가 있었다. 유베는 San Siro에서 Inter Milan을 꺾었고, 1969년 3월 9일 Cagliari를 꺾은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결국 5위로 시즌을 마쳤다.

 

HEADQUARTERS

1947-64 Piazza San Carlo 206

1964-85 Galleria San Federico 54

 

GROUND

1933-90 Corso Sebastopoli Stadium

 

 

       Chairmen



1956-62 Umberto Agnelli


1962-71 Vittore Catella

  엔지니어 겸 비행 조종사이면서 스포츠에 큰 관심을 보였던 그는, 1962년 Agnelli 가(家)의 부름을 받았다. 그가 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유베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노력과 능력은 클럽이 문제들을 극복하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 팀은 1965년 이탈리안 컵을 차지했고 1967년 스쿠데토를 따냈다. 그는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는 Remo Giordanetti의 도움을 받아 직무를 수행했다. Catella는 1971년 여름, Boniperti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Captains



1961-65 Omar Sivori

1965-69 Ernesto Castano

 

 

       Coaches



1961-62 Gunnar Gren-Julius Korostolev (61년 9월 10일부터 Carlo Parola)

  1961-62 시즌, Gunnar Gren과 (1946-47 시즌 유베에서 공격수로 뛰었던) Julius Korostolev는 짧은 기간동안 팀을 맡았다. 그들은 시즌이 끝나기 전에 Carlo Parola로 교체되었다.

 

1962-63 Paulo Amaral

  머리가 벗겨져 강한 인상을 주었던 이 브라질인은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브라질 국가대표팀과 Botafogo나 Vasco de Gama와 같은 위대한 팀을 지휘했던 사람이다. 그는 유베에 4-2-4 포메이션을 이식했고, 많은 팬들과 선수들의 회의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1962-63 시즌에 2위를 차지했다. (스쿠데토를 당시, 강력했던 Inter Milan이 가져갔다.) 그는 다음 시즌 초반에 Eraldo Monzeglio와 교체되었다.

 

1963-64 Paulo Amaral (63년 10월 6일부터 Eraldo Monzeglio)

 

1964-69 Heriberto Herrera


  1926년, 파라과이에서 태어난 그는 스페인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그는 훈련이 부족한 것으로 보이는 팀에, 피치 안팎으로 질서를 주입시키기 위해 투입되었다. 타협을 모르는 감독이었던 그는 당시에는 보기 드물었던 많은 움직임을 하는 게임을 선호했다. 1964년부터 그는 "movimiento(movement)" 축구를 (많이 움직이는 축구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유베에서 실현했다. 이 것은 네덜란드 대표팀이 이와 유사한 경기를 보여준 것보다 무려 5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그는 부임과 동시에 독재자처럼 군림했다. 때문에 당시 주장이었던 Sivori는 이 새로운 방식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고, 감독은 선수단을 장악한다는 의미에서 그를 배제하기 시작했다.

  유벤투스의 스쿼드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음에도, 이런 힘든 훈련을 통해 다시 선두권에 복귀했다. 1964년부터 69년까지 사이에 Heriberto Herrera의 지휘 아래에서 비안코네리는 1965년 이탈리안 컵에서 우승했고, 1967년 스쿠데토를 따냈다. 또한 1966년 Fairs 컵에서는 결승전까지 올라갔으며, 1968년에는 유러피언 컵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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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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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ventus/History2009.08.06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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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iperti's first titles

1949-57: great foreign aces are the new stars: from Martino to John Hansen and Praest

Carver 아래의 캄피오네들

  1949년 여름, '그란데 토리노'가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사라졌다. (그란데 토리노는 유벤투스와 함게 세리에A에서 유일하게 5연속 우승 기록을 남겼던 팀입니다. 그 외에도 45/46 시즌부터 48/49 시즌까지 4시즌 연속 홈경기 무패, 93 경기 연속 리그 경기 무패, 한 시즌 최다 승점, 홈경기 최다 점수차 승리, 원정경기 최다 점수차 승리, 한 시즌 최다 승리, 한 시즌 최다 팀 득점 등 많은 기록을 세웠으며 이 중에는 현재도 깨지지 않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Torino_F.C.)

  하지만 유베의 스쿼드에는 새로운 스타가 있었다. 골키퍼 Giovanni Viola, 풀백 Bertuccelli, 하프백 Piccinini, 그리고 센터 포워드 Vivolo는 모두 계약이 되어있었다. 또한 아르헨티나인 포워드 Rinaldo Martino와 덴마크인 레프트 윙어 Karl Aege Praest가 클럽에 합류했다. 유베는 새로운 시즌을 시작했다. 그리고 유베는 중요한 승리들을 계속했다. 하지만 1950년 2월 5일, Comunale를 가득 메운 관중 앞에서, 유베는 Gren, Nordahl, Liedholm을 앞세운 AC Milan에게 1-7로 무너졌다. 하지만 팀은 다시 승리를 계속해나갔다. 결국 시즌 종료를 4주 앞두고 여덟 번째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들은 이 시즌 100 득점을 했고 43점 만 실점했다. Hansen이 28골로 득점 1위를 차지했고 Boniperti가 21골로 2위에 이름을 올렸다.

 

팀을 떠난 Martino. 유베의 브라질 투어

  그 이듬해는 유벤투스에게 그리 좋지 않았다. Martino는 집이 그리워 아르헨티나로 떠나버렸다. 덴마크에서 온 Karl Hansen이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Rino Ferrario가 팀에 합류, 디펜스를 강화했다. 하지만 1950-51 시즌은 그리 좋지 않았다. 쉬운 경기들에서 승점을 잃는 등, 몇몇 문제들 때문에 3위에 그치고 말았다. 유베는 세계 축구 역사상 최초의, 클럽 월드컵 형태의 토너먼트였던 "Taca de Rio"에 참가하기 위해 브라질로 떠났다. 비안코네리는 Red Star Belgrade, Nice, Palmeiras, Austria Vienna를 꺾었다. 하지만 관중으로 꽉찬 Maracanà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두 번의 결승전에서 Palmeiras에게 졌다.

 

헝가리인 감독 Sarosi와 함께 했던 1952년 스쿠데토

  유베는 1951-52 시즌, 감독을 Carver에서 Sarosi로 교체했다. 하지만 Viola; Bertuccelli, Manente; Mari, Parola, Piccinini; Muccinelli, Karl Hansen, Boniperti, John Hansen, Praest로 이루어진 스타팅 라인업은 변하지 않았다. 시즌은 출발부터 좋았다. 7연승을 거둔 이후, 처음으로 무승부를 했다. 그 다음으로 또 4연승을 했다. 유베는 승점 60점, 98득점, 34실점으로 아홉번째 스쿠데토를 따냈다. 비안코네리는 다음 두 시즌 동안 더 강해졌다. 하지만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는 등, 여러가지 문제도 생겼다. 그래서 53년과 54년, 유베가 각각 승점 2점, 1점 뒤져 연속으로 준우승을 하는 동안, Inter Milan이 타이틀을 가져갔다.

 

Puppo와 어린 선수들

  1954년 9월 18일, Gianni Agnelli가 회장직에서 물러났고, 유벤투스에게는 암흑기가 찾아왔다. Puppo 감독이 이기지도 못하면서 계속 고집스럽게 어린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는 바람에 1954-55 시즌에는 7위에 그쳤고, 그 다음 시즌에는 12위를 했다. Colombo, Garzena, Emoli, Stacchini, Vavassori처럼 나중에 뛰어난 선수가 되는 어린 선수들이 이때 데뷔했다. 하지만 그들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 좋은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 다음 시즌에도 발전이 없었다. 하지만 변화가 다가오고 있었다. 1956년 11월, 드디어 변화가 찾아왔다. Umberto Agnelli가 클럽 커미셔너(이사의 개념이라고 보면 될 듯 합니다.)에 지명된 것이다. 1956-57 시즌은 그 다음 시즌을 대비한 스쿼드 강화로 계속되었다. Cesarini의 추천으로 아르헨티나인 포워드 Omar Sivori와 계약을 맺었다. 파워풀한 웨일즈인 센터 포워드 John Charles도 영입했다.


HEADQUARTERS

1947-64 Piazza San Carlo 206

 

GROUND

1933-90 Corso Sebastopoli Stadium

 

 

       Chairmen


 

1947-54 Giovanni Agnelli

  스물 여섯에 불과했던 1947년 7월 22일, 그는 아버지, Edoardo와 똑같이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Giovanni가 회장이었던 기간도 클럽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는 John Hansen, Martino, Praest를 영입한 것 같은 좋은 계약들을 성사시켰다. 그 뿐 아니라 Viola, Bertuccelli, Piccinini와 같은 이탈리아의 어린 재능들에 집중하기도 했다. 그는 유베가 1950년과 52년에 타이틀을 차지했던 Great Juve를 만드는데 전력을 다했다. 'Avvocato'는 1954년 9월 18일, FIAT에서의 일에 더 집중하기 위해 회장에서 물러났다.

 

1954-55 (acting as Chairman) Enrico Craveri, Nino Cravetto, Marcello Giustiniani

  Giovanni Agnelli가 동생 Umberto에게 회장직을 넘겨주기 전, 1년 동안 회장직을 대행하는 3인 체제. Craveri는 이미 1935-36년 Edoardo Agnelli 사후, 이 일을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클럽의 임원진이었던 Cravetto와 Giustiniani에게는 이것이 낯선 경험이었다.

 

1955-56 (emergency commisioner) Umberto Agnelli

  1955년 11월 8일, 팀과 클럽에게 적절한 타이밍에, 그는 20세의 나이로, 비상체제 커미셔너가 되었다. 그리고 1956년 회장이 되었다. 그의 등장, Omar Sivori와 John Charles의 영입, 여태껏 따낸 스쿠데토를 모두 조합해 유벤투스는 다시 승리의 유전자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세 개의 스쿠데토와 두 번의 이탈리안 컵을 따냈다. 그는 1962년 회장에서 물러났다.

 

1956-62 Umberto Agnelli



       Captains



1945-54 Carlo Parola

1954-61 Giampiero Boniperti

 

 

       Coaches


 

Jesse Carver


Giampiero Combi-Luigi Bertolini (51년 12월 02일 Giorgy Sarosi가 부임할 때까지)

  1949년 여름 해고된, 전임 감독 Chalmers처럼 영국인이다. 그는 체력 훈련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팀은 좋은 선수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래서 첫 시즌에 리그 타이틀을 따내는 것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별로 좋지 않았던 1950-51시즌 이후 그는 해임되었다. 사실 성적때문에 해고된 것은 아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선수들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했기 때문에 해임되었다. 후에 그는 Lazio와 Torino, Roma와 같은 팀을 맡기도 했다.

 

Giorgy Sarosi

  1912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그는 Ferencvaros와 (1938년 월드컵 2위를 했던) 헝가리 국가대표에서 뛰었던 하프백이었다.

  1951년 여름, 유벤투스와 계약을 맺기 전에 이미 그는 제법 유명한 감독이었다. 하지만 절차 상의 문제가 있어 그는 12월에나 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고등 교육을 받았고, 감독으로도 아주 적합한 사람이었던 그는 1952년 타이틀을 따냈다. 이후에는 이탈리아 내외로 여러 클럽에서 감독을 맡았다.

 

Aldo Olivieri

  Verona 태생의 이탈리아인인 그는 1938년 월드컵 우승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Udinese를 3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끌어올려 스스로가 좋은 감독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1953년에 유베에 합류한 그는, 2년 연속으로,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다. 그는 1955년 팀을 떠났다.

 

Sandro Puppo

  Piacenza 태생의 이탈리아인인 그는 나름의 철학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졌다. 어린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이 것 때문에 그가 젊은 선수들이 많았던 1955~1957년의 유베 감독으로 오게 되었다. 그는 Vavassori, Emoli, Garzena, Colombo, Stacchini처럼 나중에 스타가 되는 선수들을 많이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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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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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ventus/History2009.07.28 19:33

       Club's history


Before and after World War II


Juve win two Italian Cups. 1947, the Avvocato Giovanni Agnelli becomes Chairman.

 

득점 기계 Gabetto

  1935-36 시즌, 유베는 챔피언 Bologna에 승점 5점 뒤진 리그 5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미 유베는 골키퍼 Valinasso, 풀백 Foni,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깰 수 없는 Monti를 보유하고 있는 데에 더해, 이 시즌 20골을 넣은 수퍼 Gabetto가 등장했다.

  그 다음 시즌에도 5위를 했지만 Borel II가 18골, 어린 Gabetto가 17골을 넣었다. Amoretti와 Foni, Rava가 여전히 강력한 디펜스 트리오를 만들고 있었다. 비안코네리는 1937-38시즌, 다시 한번 리그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Ambrosiana Inter에 뒤진 2위로 시즌을 끝냈다. 하지만 이 시즌, 유베는 결승전에서 Torino를 꺾고 첫 번째 이탈리안 컵을 차지했다.

 

Parola의 등장

  1938-39 시즌, 유벤투스는 여전히 Depetrini, Foni, Gabetto와 같은 훌륭한 선수들이 있었지만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바로 다음 시즌에는, Ambrosiana Inter와 Bologna에 밀려 3위를 차지했다. 한가지 긍정적인 점은 아주 어린 중앙 수비수가 시즌 후반기에 데뷔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Carlo Parola였다. 1940-41 시즌, 팀은 다시 6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다음 해, AC Milan을 꺾고 두 번째 이탈리안 컵을 따냈다. 알바니아인 Lustha가 Gabetto와 함께 공격을 이끌었다. 이탈리아가 세계 제 2차 대전에 뛰어들면서 리그에게는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리그가 중단되지는 않았다. 당시 유벤투스는 늙기는 했지만 여전히 클래스를 유지하고 있는 Giuseppe Meazza를 데리고 있었다. 하지만 Gabetto가 Torino로 팀을 옮겨버렸다. 이 시즌 유벤투스는 Torino와 Livorno(놀랍게도!!!)에 밀려 3위를 차지했다.

 

전시(戰時)의 리그

  전쟁이 가장 심해졌던 시기에도 축구는 계속되었다.

  1944년, 유벤투스는 지역 토너먼트에 다른 두 팀과 함께 참가했다. 그 중에 한 팀은 당시 유벤투스의 회장인 Piero Dusio가 소유하고 있던 자동차 공장 Cisitalia였다. 유벤투스는 Sentimenti IV, Rava, Depetrini, Parola, Sentimenti III, Borel II가 뛰었고, Foni, Varglien II, 알바니아인 Lustha, Santacroce가 Cisitalia에서 플레이했다. 경기 중에 스탠드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토너먼트가 중단되었다.

 

Gianni Agnelli 회장과 Boniperti의 등장

  1945년 10월 14일, 마침내 리그가 다시 시작되었고, 곧장 더비 경기가 벌어졌다. Torino는 이미 'Grande Torino'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유베도 이미 강했고 2-1로 승리했다. 그 이후는 두 팀 간의 치열한 경쟁이었다. 하지만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Torino는 Livorno를 꺾었지만 유베는 Napoli를 상대로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타이틀은 Granata가 차지했다. 이 해 여름, 팀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1947년 7월 22일,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Avvocato' Gianni Agnelli가 회장이 되었다. (Avvocato는 the lawyer라는 뜻입니다.) 구단의 새 프론트가 맺은 첫 번째 중요한 계약도 1947년에 있었다. 그 계약은 Barengo의 꼬마, Giampiero Boniperti였다.(이때 그의 나이는 열 아홉이었습니다.) 유베는 이미 다른 포지션에 Parola와 Sentimenti IV라는 두 명의 스타 플레이어를 데리고 있었다. 그의 등장으로 드디어 팀이 그렇게 오랫동안 찾았던 센터 포워드가 합류하게 됐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어린 선수, 덩치는 작지만 기술이 뛰어났던 Muccinelli와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됐다. 1948년 여름, 유베는 덴마크 출신의 체격 조건이 좋은 포워드를 한 명 사왔다. 그의 이름은 John Hansen. 그는 아주 파워풀했고 헤딩 경합이 아주 좋았다.

 

HEADQUATERS

1933-43 Via Bogino 12

1943-47 Corso IV Novembre 151

 

GROUND

1933-90 Corso Sebastopoli Stadium


       Chairmen


 

1935-36 Enrico Craveri-Giovanni Mazzonis

  Enrico Craveri, 비안코네리 프론트였던 그는 Edoardo Agnelli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회장이 되었다. 그는 1908년부터 1912년까지 유벤투스의 선수였으며 나중에 Edoardo Agnelli의 오른팔이 되었던 Giovanni Mazzonis의 절친한 친구였다.

 

1936-41 Emilio de la Forest de Divonne

  토리노의 귀족이면서 파시스트 정권과 친분이 있었던 그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은 Edoardo Agnelli의 뒤를 이을 사람은 그만큼 명성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클럽의 생각을 채워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1941년까지 회장직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인 클럽 운영은 경험이 있었던 Craveri, Mazzonis, Remmert가 맡아서 했다.

 

1941-47 Piero Dusio

  그는 젊은 시절,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유벤투스에서 오른쪽 윙어를 했던 제법 괜찮은 축구선수였다. 은퇴한 뒤에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고 Cisitalia의 오너로서 전쟁이 벌어지던 기간 동안 유벤투스가 일정한 수입을 올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1947년, 그는 Giovanni Agnelli가 회장이 되도록 설득했다.

 

1947-54 Giovanni Agnelli

  스물 여섯에 불과했던 1947년 7월 22일, 그는 아버지, Edoardo와 똑같이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Giovanni가 회장이었던 기간도 클럽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는 John Hansen, Martino, Praest를 영입한 것 같은 좋은 계약들을 성사시켰다. 그 뿐 아니라 Viola, Bertuccelli, Piccinini와 같은 이탈리아의 어린 재능들에 집중하기도 했다. 그는 유베가 1950년과 52년에 타이틀을 차지했던 Great Juve를 만드는데 전력을 다했다. 'Avvocato'는 1954년 9월 18일, FIAT에서의 일에 더 집중하기 위해 회장에서 물러났다.



       Captains


 

Virginio Rosetta

Luis Monti

Mario Varglien II

Pietro Rava



       Coaches

 


Virginio Rosetta

  축구 선수로서도 전설이었던 그는 선수 겸 감독으로 커리어를 마쳤고 그 이후로는 3년 간(1936년부터 39년까지) 팀을 감독했다. 그는 축구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경험과 지식들을 잘 이용했다. 감독에서 물러난 뒤에는 클럽의 스카우터로 남았고 Parola와 Boniperti같은 젊은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Umberto Caligaris

  1938년 Brescia에서 풀백으로서의 경력을 마감한 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팀 동료였던 Rosetta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유베에 돌아왔다. 그는 좋은 감독이었지만 1940년, 예전에 함께 뛰었던 선수들과의 기념 경기 도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그때 마흔도 채 되지 않았다.

 

Federico Munerati

  그는 열심히 뛰었고, 기술도 있었고, 득점도 많았다. 그래서 1922년부터 33년까지, 11시즌 동안이나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였다. 그 이후에는 유스 팀 감독이 되었고 1940년에 퍼스트 팀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42년 이탈리안 컵을 따냈다.

 

Giovanni Ferrari

  이탈리아 국가대표로서 두 번의 월드컵 우승과 여덟 번의 리그 타이틀. (그 중 다섯 번은 유벤투스와 함께했다.) 포워드로서 그의 경력은 대단하다. 유벤투스에서 그는 자신의 화려한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1960년에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유베의 감독으로 있었던 동안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 한 시즌(1941-42) 만에 물러났다.

 

Felice Borel

  30년대, 유베에서 센터 포워드로 뛰면서 많은 득점을 했던 그는 1942년부터 46년까지의 암울했던 시기, 선수 겸 감독으로 있었다.

 

Renato Cesarini

  1930년부터 35년까지, 리그를 지배했던 5년 간, 그는 유베에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 그리고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서 감독이 되었다. 유베는 그를 잊지 않았고 그를 1946년부터 48년까지, 그리고 1959년, 이렇게 두 번이나 채용했다.

 

William Chalmers

  거드름을 피우기를 좋아했던 영국인인 그는 Cesarini의 자리를 1948년에 이어받았다. 그는 선수들이 호텔에 있든, 기차에 있든, 어디에 있는지는 관계없이 그들을 훈련시키는 변덕을 부렸다. 구단 프런트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이런 미친 짓에 익숙하지 않은 선수들도 그를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 시즌 뒤에 해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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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vel
Juventus/History2009.07.23 16:28
       Club's History

The dream team becomes "Italy's girlfriend"

5회 연속 우승
  Ferrari, Vecchina, Varglien II가 팀에 왔다.
  이 시기는 유벤투스가 1930년부터 35년까지 다섯 번 연속 우승을 차지하면서 '이탈리아의 여자친구'가 된 때이다. 아녤리와 그의 대리인 Baron Giovanni Mazzonis di Pralafera가 경영한 시기, 팀은 점차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29-30 시즌에 시작된, 그룹 하나로 구성된 리그(Serie A)는 축구 선수들에게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그 시즌, 이미 스타였던 Varglien I과 Caligaris에 더해서 Mumo Orsi와 Renato Cesarini가 팀에 합류했다. 다음 해에는 포워드 Giovanni Ferrari, 센터 포워드 Vecchina와 하프백 Varglien II가 들어왔다. 이미 전설적인 수비 트리오 (Combi-Rosetta-Caligaris)를 보유하고 있던 유베는, 당시 리그를 지배하고 있던 Ambrosiana Inter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가공할 공격진 (Munerati-Cesarini-Vecchina-Ferrari-Orsi)을 갖추게 됐다.
  유베는 곧 리그의 정점에 서게 됐다. 봄에 반짝했던 로마에게 일격(1931년 3월 15일, 로마에서 0-5로 패)을 당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폼을 계속 유지, 토리노에서 복수를 해주기도 했다. 인터 밀란에게도 승리를 거두면서 우승을 못 박았다.

수비의 거인, Monti
  다음 시즌을 위해서 Carcano에게 필요한 것은 거의 없었다. 새롭게 사인을 한 선수는 경험많은 하프백 Lisito Monti 그의 곧은 성격과 굳은 의지로 Monti는 자신이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수비수임을 보여주었다. 시즌 초기에는 모든 팀들이 유베를 꺾으려고만 해서 작은 문제들이 몇 가지 나타났다. 하지만 그 문제들은 곧 해결되었고 선수들은 다시 폼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했다. Orsi와 그 동료들이 Ambrosiana Inter를 박살냈던 1932년 1월 17일 경기가 기억할 만하다. 1932년 3월 6일, 로마를 7-1로 꺾은 뒤부터는 탄탄대로였다.
  5월 1일, Corso Marsiglia 경기장에서 볼로냐를 3-2로 꺾었다. 이 경기로 비안코네리는 2연속 스쿠데토를 차지했다. Orsi는 20골로 득점 1위를 차지했고 Ferrari, Vecchina, Munerati도 각각 17골, 15골 14골로 이름을 올렸다.

Borel II와 Bertolini
  1932년 여름, 유벤투스는 하프백 Bertolini와 윙어 Sernagiotto를 데려왔다. 하지만 새로운 선수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선수는 유스팀에서 올라왔다. 젊은 포워드 Felice Placido "Farfallino" Borel이었다. (Farfallino는 나비 넥타이라는 뜻이라고 하는군요.) 그는 늘 안쪽 포워드(inside forward)로 플레이했지만 Vecchina가 부상당했을 때에는 센터 포워드로 뛰기도 했다.
  1932-33 시즌의 중요한 골들은 거의 Borel이 득점했다. 유베는 승점 54점으로 Ambrosiana에게 8점 앞선 1위를 차지했다. 28경기에서 29골을 넣은 Borel에게는 최고의 시즌이었다.

새 경기장과 더 많은 스쿠데토
  4회 연속 스쿠데토를 차지한 34년에도 Borel의 활약은 계속되었고, 그는 31골을 넣었다. 유난히 좋은 시즌을 보냈던 Ambrosiana에게 승점 4점을 앞섰다. 유벤투스도 그들을 꺾지는 못했다는 사실이 이번 스쿠데토를 더욱 값지게 했다. 1934년 2월부터 팀은 새로운 스타디움 Stadio Comunale에서 경기를 할 수 있게 됐다.
  유베는 35년에도 스쿠데토를 차지해, 5연속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 시즌에는 많은 선수들이 국가 대표팀에서 뛰고 싶다는 욕심에 팀을 떠났다. (1934년은 이탈리아 월드컵이 있었고, 이탈리아는 우승으로 줄 리메 컵을 차지했습니다.) Combi는 이미 은퇴를 결정, 5회 연속 우승의 마지막 시즌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젊은 피 Foni와 Serantoni가 팀과 함께 했습니다.

HEADQUARTERS
1922-33 Corso Marsiglia
1933-43 Via Bogino 12

GROUND
1922-33 Corso Marsiglia
1933-90 Stadio C.so Sebastopoli


       Chairmen


Edoardo Agnelli (1892 - 1935)


       Captains


1930-35 Viri Rosetta


       Coaches


1930-34 Carlo Carcano
  Masnago에서 1891년 출생. 센터 하프백으로 Alessandria에서 경력을 쌓았고 이탈리아 국가대표로도 뛰었다. 그는 감독을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상태에서 유벤투스를 맡았다. 그는 팀에 몸담고 있는 많은 스타선수들 간의 경쟁과 갈등을 조절하는데 뛰어났다. 그는 '전설적인 5년', 즉 31, 32, 33, 34년의 우승과 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는 1934년 가을에 갑자기 교체되었다. 그래서 다섯 번째 연속 우승은 20년대, 유벤투스의 중요한 선수였던 Carlo Bigatto가 감독이 되어 대신했다.

1934-35 Carlo Carcano, from 1934.12.16  Carlo Bigatto-Benedetto Gola

사진과 텍스트의 출처는 Juventus.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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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ventus/History2009.07.19 03:00
       Club's History

Twenties and the second League title

1923: Edoardo Agnelli is Chairman. 1925, with Hirzer, the Club win their second title.

Edoardo Agnelli 회장
  1923년 7월 24일. 피아트 설립자의 아들 Edoardo Agnelli가 회장에 선출되었다.
  유벤투스는 Corso Marsiglia에 벽돌로 지은 클럽 전용 경기장을 갖고 있었다. 팀은 점점 강해졌다. 주목받고 있던 풀백 Viri Rosetta가 Vercelli에서 유벤투스로 왔다. Combi는 이미 오른쪽 윙어 Munerai, Grabbi, Bigatto와 기술이 좋은 센터 포워드 (곧 영화배우가 되는) Pastore와 함께 팀의 일부분이 되었다. 유벤투스 역사상 최초의 감독은 헝가리에서 온 Jeno Karoly였다.

두번째 스쿠데토
  Karoly는 선수, 팬들을 포함한 클럽의 모든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팀의 진짜 에이스는 또 다른 헝가리인, 레프트 포워드 Hirzer였다. 유벤투스는 Northern League의 B 그룹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결승전에서는 최고의 팀이었던 볼로냐를 만났다. 1926년 7월 11일, 볼로냐에서의 첫 경기는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리고 7월 25일에 토리노에서의 두 번째 경기도 득점 없이 비겼다. 스쿠데토의 향방을 결정짓기 위해서는 또 한번의 경기가 필요했다.

8월 2일, Edoardo Agnelli의 유베는 밀란에서의 경기를 2-1 승리로 장식하면서 스쿠데토를 따냈다. 이날의 라인업(Combi, Rosetta, Allemandi, Grabbi, Viola, Bigatto, Munerati, Vojak, Pastore, Hirzer, Torriani)은 역사에 길이 남았다. 이 경기를 며칠 앞두고 Karoly 감독이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 직후, 유베는 중남부 그룹의 우승팀, Alba Roma를 홈 경기 7-1, 원정 경기 5-0으로 발라버렸다.

Hirzer에서 Orsi까지
  그 다음 시즌도 언제나처럼 멋진 승리들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준결승 그룹에서 토리노가 우승을 차지해 버리는 약간의 불확정 요소가 생겼다. 게다가 리그 규정이 바뀌면서, 팀은 최고의 선수 Hirzer를 잃었다. 그를 대신해서 나이가 좀 있었던 Cevenini III가 투입되었다. 그는 인터 밀란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었지만 유벤투스에서 그의 활약은, 팀이 볼로냐와 인터 밀란을 따라잡을 만큼은 못 됐다. 그리고 20년대의 끝자락에 Serie A가 만들어졌다. 이제 축구는 엄청난 팬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유벤투스도 다시 한 번 정상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Caligaris, Cesarini, Raimundo Orsi와 같은 훌륭한 선수들이 왔다. 특히 Orsi는 이탈리아 태생이지만 아르헨티나 유니폼을 입고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관중들을 열광시키는 플레이를 보여주기도 했다.

HEADQUARTERS
1922-33 Corso Marsiglia

GROUND
1922-33 Corso Marsiglia


       Chairmen


Edoardo Agnelli (1892 - 1935)
  Verona에서 태어난, 피아트 설립자의 아들 Edoardo는 1923년 7월 24일 화요일에 사람들의 환호 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Hurrà Juventus"는 그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매우 영리하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의 아버지인 Giovanni Agnelli 의원의 경영을 도우면서 사회, 삶, 일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했다. 진정한 스포츠 매니아, 실력있는 드라이버, 토리노 마상경주회(馬上競走會)회장, 피아트 스포츠 그룹 명예회장. 그는 우리 클럽에 자신의 경영 철학을 들여왔고 클럽의 이름을 이탈리아 스포츠 역사에 길이 빛날 이름으로 만들 것이다.>
  그의 경영 체제 하에서 팀은 환골탈태했다. 유벤투스의 첫 번째 외국인 스타 Ferenc Hirzer와 첫 번째 감독 Jeno Karoly, 두 헝가리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유벤투스는 그 이름을 유럽 스포츠 무대에 알렸다. Agnelli의 재임 기간 동안 팀은 여섯 번 우승했고 그 중에 1930년부터 35년까지 5회 연속 우승 기록도 있다. 그는 비극적인 사고로 사망했다. 유명한 조종사인 Arturo Ferrarin이 조종하는 비행기를 타고 제노아의 항구에 접근을 시도하던 중에 일어난 충돌 사고였다. 1935년 7월 13일의 일이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 비행기는 수상비행기였고 착륙을 시도하던 중, 물에 떠있던 통나무에 비행기가 충돌, 아녤리의 머리가 계속 돌고 있었던 프로펠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Edoardo_Agnelli_(industrialist))


       Captains


1922-29 Carlo Bigatto


       Coaches


1923-26 Jeno Karoly
  유벤투스 역사에 등장한 첫 번째 감독. 1923년, Agnelli 회장이 취임 후 처음으로 한 일이 바로 그를 감독으로 채용한 것이었다. 그 당시 유럽 축구를 주름잡던 헝가리 축구에서 많은 것을 배운 그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다시 한 번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는 1903, 1905년 헝가리 리그 득점왕을 했습니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Jenő_Károly) 그의 능력에 비춰보아 그가 받던 봉급도 적절했다. "2,500 리라 선불에 팀이 그룹에서 우승할 경우 10,000 리라의 수당이 지급되었다. 1주일의 유급휴가도 있었다. Karoly가 할 일은, 팀 훈련 계획을 짜고, 선수들을 가르치고 완전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세 시즌을 거치면서 완전히 조련된 팀을 만들어 냈고 그 팀은 1925/26 시즌에 스쿠데토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르친 선수들이 만들어 낼 영광을 함께 누리지 못했다. 볼로냐와의 결승전을 불과 몇 일 앞두고 심장마비로 죽었기 때문이다.

1926-28 Joszef Viola (József Viola 또는 Giuseppe Viola 라고도 씀)
  1896년, 헝가리 태생인 Viola는 Spezia의 중앙 하프백으로 이탈리아에 처음 발을 디뎠고 1924년에 유벤투스로 팀을 옮겼다. 그는 1926년에 스쿠데토를 차지했고 Karoly의 요절로 그의 자리를 대신해 감독이 되었다.

1928-30 George Ajtken
  Agnelli는 1928년, 이 스코틀랜드 인을 채용했다. 'System' (Formation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의 창시자, Chapman의 추종자였던 그는 이탈리아에서 축구를, 체력이라는 측면에서 고려하고 그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첫 번째 감독이었다. 그래서 클럽에서 오랫동안 뛰었고, 또한 이미 팀의 많은 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기술이 뛰어난 선수들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감독 자리는 1930년, Carlo Carcano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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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ventus/History2009.07.16 15:45
       Club's History

Before and after World War I



힘든 시간들

  첫 번째 스쿠데토 이후에는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회장이었던 Dick이 클럽을 떠났고 실력 있는 외국인 선수들이 그를 따라 갔다. 이런 고난들은 유벤투스가 스스로의 목표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했다. 팀은 새롭게 떠오르는 강 팀 Pro Vercelli와, 상위권을 목표로 하는 또 다른 팀 Casale를 상대하게 됐다. 1913/14 시즌이 끝난 뒤에는 세계 제 1차 대전이 일어났다. 그 다음 시즌은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가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중단되었다.

Hurrà Juventus의 창간

  다수의 선수와 클럽의 직원들이 전쟁터로 갔고 그 중에 몇몇은 돌아오지 못했다. 클럽의 소식을 계속 전달하기 위해서 1915년 6월 10일, Hurrà Juventus가 Corradino Corradini를 편집장으로 하여 창간되었다. "승리는 믿음을 가진, 강한 자의 것이다"라는 모토가 표지에 실렸다.
  제 1차 대전은 1918년 11월에 끝났다. 유벤투스의 창립자들 중 몇 명이 전쟁터에서 죽었지만 승리를 향한 집념은 꺾이지 않았다. 1919년 10월 12일, 팀은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곧 이탈리아 국가대표가 되는 골키퍼 Giacone (유벤투스 소속으로 국가대표가 된 선수는 그가 처음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곧 국가대표가 될 두 풀백 Novo, Bruna (이 둘은 Rosetta-Caligaris 에서 Foni-Rava로 이어진 최강 수비수 콤비의 원형을 보여주었다.)가 팀과 함께 했다. 또한 Bona와 Giriodi의 결정력에 거는 기대도 컸다. 이 모든 것들은 1920년 3월 7일에 Casale를 꺾은 경기나 North Group 결승전에서 Genoa를 꺾은 5월 16일 경기 (특히 이 날 Bona는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처럼 좋은 성적을 내는데 충분했다. 하지만 우승을 하기에는 충분치 못했다. 우승은 Internazionale에게 돌아갔다.
(하여튼 인터 밀란은-_-;;)

Combi의 등장

  사람들은 이제 축구를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포터들의 응원이 항상 팀의 성적과 일치하지는 않았다. 1921년, 팀은 선두 그룹에서 뒤처지게 됐고, 1922년과 23년에는 Northern Group에서 조차도 성적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변하게 마련이다. 원래는 선수였지만 건강 상의 이유로 클럽 직원이 된 Marchi 2세가 엄청난 발견을 했다. 유스 경기를 보던 그는 젊은 골키퍼에게 반해버렸다. 그 선수의 이름은 Giampiero Combi. 1923년, 그는 18세의 나이로 A팀의 주전이 돼 있었다.

HEADQUARTERS:
1906 Via Donati 1.
1919-21 Via Carlo Alberto 43.
1921-22 Via Botero 16.

GROUND
1906-08 Piazza d'Armi (Corso Vinzaglio side)
1908-22 Corso Sebastopoli


       Chairmen



1907-10 Carlo Vittorio Varetti
  클럽 창립자 중 한 명으로, 1905년 우승팀의 스트라이커로 뛰었고 1907년에 회장이 되었다. 팀원들이 직접 만들었던, 클럽 내 신문의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경기 티켓을 파는 것 같은 실질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1911-12 Attilio Ubertalli
  그는 Varetti의 뒤를 이어 1911년과 1912년, 2년 동안 회장을 맡았다. 그 기간 동안은 승리가 없었다.

1913-15 Giuseppe Hess
  스위스 출신으로 유벤투스의 사상 첫 경기에 풀백으로 출전하기도 했던 그는 "Bino"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는 1905년 리저브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1912년까지 선수로 뛰고는 곧바로 Ubertalli의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다.

1915-18 facenti funzione Gioacchino Armano - Fernando Nizza - Sandro Zimbelli

1919-20 Corrado Corradini
  교수이면서 시인이었던 그는 1915년에 전시(戰時) 유벤투스의 팬들에게 보내는 "Hurrà Juventus"를 창간했다. 그는 1919년 회장에 선출되어 1년 동안 그 일을 맡았다. 그는 이미 많이 늙었기 때문에 1923년에 죽었다.

1920-23 Gino Olivetti
  변호사였던 그는 창립자들의 친구였고 동년배였다. 그의 재직 기간은 유벤투스 만의 스타디움을 건설하는 것고 뗄 수 없다. Olivetti의 친구 Surveyor Manateri가 Corso Marsiglia에 "Juventus Field"를 세웠고 Olivetti는 1923년 왕자, 시 관료들과 함께 스타디움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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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ventus/History2009.07.12 22:10
Club's History

From the beginnings to the first Scudetto

1898 ~ 1905: from the first matches to the Italian title

핑크색 유니폼

  드디어 유벤투스가 경기를 치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Enrico Canfari의 기록이다. "FC Torinese가 우리에게 초청경기를 제의했다. 사실 우리는 정규 선수들을 상대로 경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우리의 첫 경기는 대 참사로 끝났다. 하지만 공을 다루는 기술도 많이 배울 수 있었고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첫 인상을 준 것 같았다. 열한 명을 수 있을 만큼 팀을 정비한 뒤에 우리는 다른 팀의 도전을 받거나 다른 팀에게 도전하기 시작했다. 토너먼트에 나갈 만큼 경험을 쌓았을 때 우리는 연고지를 토리노로 정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유니폼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면, 플란넬, 모직물 중에 어떤 걸로 할지를 정하는 건 힘들었다. 결국에는 1902년까지 입었던 얇은 핑크색 면 유니폼을 택했다. 그 이후로는 색이 바래져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1988년에 팀은 이름은 Juventus Football Club으로 바꾸었다. 1900년부터 클럽은 리그의 일원이 되었다. 첫 번째 공식 경기는 3월 11일, FC Torinese에게 패했던 경기였다. 1901년, 유벤투스는 준결승에 올랐고, 1903년과 1904년에는 결승전에세 Genoa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탈리안 챔피언

  1905년은 Bianconeri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특별한 해였다.
  검은 색과 흰 색은 Nottingham에서 들여온 색깔이었다. Durante가 골키퍼로, Armano와 Mazzia가 풀백으로, Watly, Goccione, Dimenti가 하프백으로, Barberis, Varetti, Forlano, Squire, Donna가 전방에서 뛰었다. Piedmont group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그들은 밀라노 사람들을 두 번 이기고 제노아와는 무승부를 거뒀다. 하지만 제노아는 밀란에게 승점 1점 밖에 따내지 못했다. 유벤투스가 이탈리아 챔피언이 된 것이다. 아직 스쿠데토는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당시 축구 협회는 우승 접시를 주었다.
  회장(실질적으로는 스폰서)은 Alfred Dick이 맡고 있었다. 팀은 그의 직물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외국인 선수들 덕분에 강해졌다. 1906년에도 우승에 아주 가까웠다. 하지만 선수들이 밀란과의 결승전에 나타나지 않았다. 중립지역이 아닌 밀라노에서 결승전이 치러지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클럽과 마찰을 빚었고 Dick은 자기와 친했던 선수들을 데리고 Torino를 만들기 위해서 팀을 떠나버렸다.

HEADQUARTERS
1898 Via Montevecchio
1899 Via Piazzi 4
1902 Via Gazometro 14
1904 Via Pastrengo

GROUND
1898 - 1904 Piazza d'Armi (Corso Vinzaglio side)
1904 - 06 Umberto I Velodrome, Corso Re Umberto


Chairmen

1897 Eugenio Canfari

1898 - 1901 Enrico Canfari (1877 - 1915)
  그는 열정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첫 번째 경기를 주선했고 클럽의 역사를 기록했다. 처음에는 센터포워드로 뛰었지만 곧 팀 동료들을 위해 심판으로 나왔다. 화학 학위를 마친 다음 그는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고, 영국에서 축구 규칙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그는 후에 자원 입대하여 1차 세계 대전의 초창기에 Isonzo 전투에서 전사했다.

1901 - 02 Carlo Favale
  Canfari 형제의 친구였다. 그는 Enrico의 자리를 잠깐 동안 대신했지만 별로 특별한 일은 없었다.

1903 - 04 Giacomo Parvopassu
  그는 Canfari 형제의 모임에 들어갈 때에 이미 유명한 변호사였다. 그는 팀 창립자들에게 행정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05 - 06 Alfredo Dick
  그는 직물 산업에 종사하는 스위스인 사업가였다. 그리고 클럽의 첫 번째 공식 스폰서였다. 그는 스위스와 스코틀랜드에서 온 노동자들 중 축구를 했던 사람들이 클럽에 가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들은 마냥 어리기만 했던 팀에 경험이라는 것을 불어넣었다. 그런 이유로, A팀과 리저브 팀, 모두 우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권위주의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창립자들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 Federico가 경기에 뛸 수 있기를 바랐지만 실력이 별로인 사람을 라인업에 넣을 수는 없었다. 여기에 화가 난 Dick은 팀을 떠나버렸다. 그는 곧장 Torino를 만들어 자신이 클럽에 가입시켰던 노동자들을 모조리 옮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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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ventus/History2009.07.03 17:57
Club's History

The Origin

November the 1st, 1897: on a bench a dream is born...

The Bench

  모든 전설은 그 시작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전설은 1897년 11월 1일, Corso Re Umberto의 벤치에서 시작되었다. Liceo D'Azeglio에서 온 아이들이 축구 클럽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들은 재미있으면서도 건강에 도움이 되는 놀이를 찾는 아이들에 불과했다.
  첫 번째 경기는 Piazza d'Armi에서 열렸다. 사실 이 곳은 육상과 승마를 위한 큰 공원이었는데 그들도 여기를 쓰기로 했던 것이다. 팀의 창립자 중 한명인 Enrico Canfari는 그때를 이렇게 기록했다.
  "1897년에 우리는 괜찮은 클럽을 한번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유벤투스의 진짜 시작이다. 좀 궁색하긴 하다. 첫 번째 모임이 열렸던 Corso Re Umberto 42번지, 그러니까 우리 Canfari 형제의 작업장은 진짜 우중충했으니까. 15명이 모였고, 그 중에서 제일 연장자는 열 일곱살, 나머지는 전부 열 다섯도 채 안됐다. 지금은 별 것도 아닌 문제겠지만 그때는 HQ를 찾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우리는 장소를 물색했고 방이 네 개에 마당과 다락방이 있는 집을 찾아냈다. 게다가 거기엔 마실 수 있는 물이 나오는 수도도 있었다."

첫 번째 회장, Canfari

  Canfari는 그 이후로 팀의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했다. "드디어 회의가 열렸지만 이름을 결정하는 건 힘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라틴어를 싫어했고, 다른 사람들은 반대였으니까. 중간에는 한 줌밖에 안 되는 중재파가 있었다.
  'Società Via Fort', 'Società sportiva Massimo D'Azeglio', 'Sport Club Juventus' 이렇게 세 개의 이름이 후보로 올라왔다. 세 번째 후보가 가장 로비를 덜 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선택됐다. 이렇게 클럽의 이름은 Sport Club Juventus가 되었다."
  클럽의 기원에 대해 많은 것을 기록해 둔 Enrico Canfari의 동생, Eugenio Canfari가 초대 회장이 되었다. 곧 새로운 HQ가 필요하게 되었고 Crocetta 구역의 Via Piazzi 4번지로 HQ가 이전하게 되었다.


Chairmen

Eugenio Canfari (1878-1962)
  제노아에서 태어난 그는 Corso Re Umberto 42번지에 있는 Canfari 집안의 자전거 공방(工房)을 클럽의 HQ로 내놓았다. 창립자들은 사의(謝意)를 표하고 싶어했고 Eugenio의 형, Enrico의 제의로 이어진 투표를 통해 그가 회장이 되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회장에서 물러나 자동차 제작에 열을 올렸다. 1902년 Taurinia를 창립했고 그 스스로는 카 레이서가 되었다.

사진과 텍스트의 출처는 Juventus.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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