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2009. 8. 13. 10:37
쌍용차. 출처는 쌍용자동차 홈페이지

  쌍용차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일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크게 두 가지이다.

  1. 쌍용차가 망하면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다 일자리를 잃는데 자기들이 정리해고 당한다고 파업하면 되냐.
  2. 쌍용차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 다 정부가 헐값에 중국 자본에 넘겨줬기 때문인데 왜 그걸 일부 노동자가 책임을 져야 되냐.

  첫 번째 시선에 대해 생각해보자.

  논리는 이렇다.
  기업의 경영이 힘들어지면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성을 확보해야한다. 그 방법으로 정리해고를 하는 것이다. 일부 노동자가 정리해고됨으로써 기업이 회생하고 비해고 노동자는 계속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즉,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가 살 수 있다는 논리일 것이다. 뭐..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사측이 정리해고를 단행하기 전에, 기업 회생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적은 듯하다. 구조조정의 최후 단계가 되어야 할, 가장 많은 타협을 거쳐 시행되어야 하는 정리해고가 왜 가장 우선적이고 비타협적으로 진행되는가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는 듯 하다.

  90년대 후반, 경제위기(해외에선 한국 경제위기로, 한국에선 IMF 외환위기로 부르고 있는)로 많은 기업이 구조조정을 했다. 뭐 어떤 기업은 임금 자진 동결, 혹은 자진 삭감으로 국가의 잘못과 기업 경영의 부조리를 노동자가 분담하기도 했다. 반면에 어떤 기업은 가차없이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더이상 생소하지 않게 되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도 조직되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노사 간의 협상에 '정리해고가 필요한 경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우선 정리해고한다.'라는 내용이 종종 포함된다는 것이다. 노측에서 먼저 제시한 내용인지, 사측에서 노측을 달래기 위해 제시한 내용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를 안전판으로 삼아 자신들의 고용을 보장받으려 했다는 것, 그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후, 이런 얘기들은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의 '귀족 노조' 논란과 더불어 노조 흠집내기에 이용되기도 했다.


대타협 한다면서요-_-; 출처는 오마이뉴스.

  2009년 오늘, '노사대타협으로 회생 절차를 밟겠다'고 선언한 쌍용차는 이런 일을 대놓고 획책하고 있다. 평택공장에서 파업 농성을 했던 노동자 중에는 정리해고에 포함되지 않았던 분들도 많다. '같은 노동자'로서 사측의 정리해고 시도를 막아내기 위해 파업 농성에 참여했던 분들이다. 오늘 오전 한겨레 (www.hani.co.kr)에 게재된 기사(쌍용차 파업노조원 '보복인사')에 따르면, 이 분들에 대해 휴업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앞으로 정리해고 대상자도 아니면서 괜히 파업에 참여하거나 하면 다들 이렇게 만들테니까 그냥 입다물고 있어라.'라고 윽박지르고 있는 것이다.

  백년도 더 전에 칼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했다.

  제발 쫌 단결하게 놔두세요. 제발 쫌.
Posted by Pavel
Juventus/History2009. 8. 6. 02:00
       Club's History

Boniperti's first titles

1949-57: great foreign aces are the new stars: from Martino to John Hansen and Praest

Carver 아래의 캄피오네들

  1949년 여름, '그란데 토리노'가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사라졌다. (그란데 토리노는 유벤투스와 함게 세리에A에서 유일하게 5연속 우승 기록을 남겼던 팀입니다. 그 외에도 45/46 시즌부터 48/49 시즌까지 4시즌 연속 홈경기 무패, 93 경기 연속 리그 경기 무패, 한 시즌 최다 승점, 홈경기 최다 점수차 승리, 원정경기 최다 점수차 승리, 한 시즌 최다 승리, 한 시즌 최다 팀 득점 등 많은 기록을 세웠으며 이 중에는 현재도 깨지지 않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Torino_F.C.)

  하지만 유베의 스쿼드에는 새로운 스타가 있었다. 골키퍼 Giovanni Viola, 풀백 Bertuccelli, 하프백 Piccinini, 그리고 센터 포워드 Vivolo는 모두 계약이 되어있었다. 또한 아르헨티나인 포워드 Rinaldo Martino와 덴마크인 레프트 윙어 Karl Aege Praest가 클럽에 합류했다. 유베는 새로운 시즌을 시작했다. 그리고 유베는 중요한 승리들을 계속했다. 하지만 1950년 2월 5일, Comunale를 가득 메운 관중 앞에서, 유베는 Gren, Nordahl, Liedholm을 앞세운 AC Milan에게 1-7로 무너졌다. 하지만 팀은 다시 승리를 계속해나갔다. 결국 시즌 종료를 4주 앞두고 여덟 번째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들은 이 시즌 100 득점을 했고 43점 만 실점했다. Hansen이 28골로 득점 1위를 차지했고 Boniperti가 21골로 2위에 이름을 올렸다.

 

팀을 떠난 Martino. 유베의 브라질 투어

  그 이듬해는 유벤투스에게 그리 좋지 않았다. Martino는 집이 그리워 아르헨티나로 떠나버렸다. 덴마크에서 온 Karl Hansen이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Rino Ferrario가 팀에 합류, 디펜스를 강화했다. 하지만 1950-51 시즌은 그리 좋지 않았다. 쉬운 경기들에서 승점을 잃는 등, 몇몇 문제들 때문에 3위에 그치고 말았다. 유베는 세계 축구 역사상 최초의, 클럽 월드컵 형태의 토너먼트였던 "Taca de Rio"에 참가하기 위해 브라질로 떠났다. 비안코네리는 Red Star Belgrade, Nice, Palmeiras, Austria Vienna를 꺾었다. 하지만 관중으로 꽉찬 Maracanà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두 번의 결승전에서 Palmeiras에게 졌다.

 

헝가리인 감독 Sarosi와 함께 했던 1952년 스쿠데토

  유베는 1951-52 시즌, 감독을 Carver에서 Sarosi로 교체했다. 하지만 Viola; Bertuccelli, Manente; Mari, Parola, Piccinini; Muccinelli, Karl Hansen, Boniperti, John Hansen, Praest로 이루어진 스타팅 라인업은 변하지 않았다. 시즌은 출발부터 좋았다. 7연승을 거둔 이후, 처음으로 무승부를 했다. 그 다음으로 또 4연승을 했다. 유베는 승점 60점, 98득점, 34실점으로 아홉번째 스쿠데토를 따냈다. 비안코네리는 다음 두 시즌 동안 더 강해졌다. 하지만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는 등, 여러가지 문제도 생겼다. 그래서 53년과 54년, 유베가 각각 승점 2점, 1점 뒤져 연속으로 준우승을 하는 동안, Inter Milan이 타이틀을 가져갔다.

 

Puppo와 어린 선수들

  1954년 9월 18일, Gianni Agnelli가 회장직에서 물러났고, 유벤투스에게는 암흑기가 찾아왔다. Puppo 감독이 이기지도 못하면서 계속 고집스럽게 어린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는 바람에 1954-55 시즌에는 7위에 그쳤고, 그 다음 시즌에는 12위를 했다. Colombo, Garzena, Emoli, Stacchini, Vavassori처럼 나중에 뛰어난 선수가 되는 어린 선수들이 이때 데뷔했다. 하지만 그들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 좋은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 다음 시즌에도 발전이 없었다. 하지만 변화가 다가오고 있었다. 1956년 11월, 드디어 변화가 찾아왔다. Umberto Agnelli가 클럽 커미셔너(이사의 개념이라고 보면 될 듯 합니다.)에 지명된 것이다. 1956-57 시즌은 그 다음 시즌을 대비한 스쿼드 강화로 계속되었다. Cesarini의 추천으로 아르헨티나인 포워드 Omar Sivori와 계약을 맺었다. 파워풀한 웨일즈인 센터 포워드 John Charles도 영입했다.


HEADQUARTERS

1947-64 Piazza San Carlo 206

 

GROUND

1933-90 Corso Sebastopoli Stadium

 

 

       Chairmen


 

1947-54 Giovanni Agnelli

  스물 여섯에 불과했던 1947년 7월 22일, 그는 아버지, Edoardo와 똑같이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Giovanni가 회장이었던 기간도 클럽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는 John Hansen, Martino, Praest를 영입한 것 같은 좋은 계약들을 성사시켰다. 그 뿐 아니라 Viola, Bertuccelli, Piccinini와 같은 이탈리아의 어린 재능들에 집중하기도 했다. 그는 유베가 1950년과 52년에 타이틀을 차지했던 Great Juve를 만드는데 전력을 다했다. 'Avvocato'는 1954년 9월 18일, FIAT에서의 일에 더 집중하기 위해 회장에서 물러났다.

 

1954-55 (acting as Chairman) Enrico Craveri, Nino Cravetto, Marcello Giustiniani

  Giovanni Agnelli가 동생 Umberto에게 회장직을 넘겨주기 전, 1년 동안 회장직을 대행하는 3인 체제. Craveri는 이미 1935-36년 Edoardo Agnelli 사후, 이 일을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클럽의 임원진이었던 Cravetto와 Giustiniani에게는 이것이 낯선 경험이었다.

 

1955-56 (emergency commisioner) Umberto Agnelli

  1955년 11월 8일, 팀과 클럽에게 적절한 타이밍에, 그는 20세의 나이로, 비상체제 커미셔너가 되었다. 그리고 1956년 회장이 되었다. 그의 등장, Omar Sivori와 John Charles의 영입, 여태껏 따낸 스쿠데토를 모두 조합해 유벤투스는 다시 승리의 유전자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세 개의 스쿠데토와 두 번의 이탈리안 컵을 따냈다. 그는 1962년 회장에서 물러났다.

 

1956-62 Umberto Agnelli



       Captains



1945-54 Carlo Parola

1954-61 Giampiero Boniperti

 

 

       Coaches


 

Jesse Carver


Giampiero Combi-Luigi Bertolini (51년 12월 02일 Giorgy Sarosi가 부임할 때까지)

  1949년 여름 해고된, 전임 감독 Chalmers처럼 영국인이다. 그는 체력 훈련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팀은 좋은 선수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래서 첫 시즌에 리그 타이틀을 따내는 것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별로 좋지 않았던 1950-51시즌 이후 그는 해임되었다. 사실 성적때문에 해고된 것은 아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선수들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했기 때문에 해임되었다. 후에 그는 Lazio와 Torino, Roma와 같은 팀을 맡기도 했다.

 

Giorgy Sarosi

  1912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그는 Ferencvaros와 (1938년 월드컵 2위를 했던) 헝가리 국가대표에서 뛰었던 하프백이었다.

  1951년 여름, 유벤투스와 계약을 맺기 전에 이미 그는 제법 유명한 감독이었다. 하지만 절차 상의 문제가 있어 그는 12월에나 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고등 교육을 받았고, 감독으로도 아주 적합한 사람이었던 그는 1952년 타이틀을 따냈다. 이후에는 이탈리아 내외로 여러 클럽에서 감독을 맡았다.

 

Aldo Olivieri

  Verona 태생의 이탈리아인인 그는 1938년 월드컵 우승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Udinese를 3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끌어올려 스스로가 좋은 감독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1953년에 유베에 합류한 그는, 2년 연속으로,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다. 그는 1955년 팀을 떠났다.

 

Sandro Puppo

  Piacenza 태생의 이탈리아인인 그는 나름의 철학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졌다. 어린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이 것 때문에 그가 젊은 선수들이 많았던 1955~1957년의 유베 감독으로 오게 되었다. 그는 Vavassori, Emoli, Garzena, Colombo, Stacchini처럼 나중에 스타가 되는 선수들을 많이 발굴했다.


사진과 텍스트의 출처는 Juventus.com 입니다.
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Posted by Pav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