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2009. 7. 29. 01:52

쌍용차 평택 공장에 공권력투입을 비판하는 전국노동자범국민대회가 지난 7 25일 평택역 광장에서 열렸다. 시민, 대학생, 민주노총 등 1만여 군중은 해고는 살인이다. 정리해고 분쇄하자.’ 와 같은 구호를 통해 쌍용차 사태는 공권력 투입이 아니라 공적자금 투입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외쳤다. 이날 무대에 선 연사 중에는 용산 참사의 희생자 이성수 열사의 부인과, 공장 안에서 물도, 전기도 없이 싸우고 있는 쌍용차 노동자의 가족도 있었다.


두 시간 가량 진행된 대회가 끝난 뒤, 쌍용차 노동자에게 전해질 물을 실은 차량을 앞세우고 거리 행진이 시작됐다. 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은 평택 역 앞 시내를 통과해 공장으로 향했다. 평택 시민들은 무더운 날씨에도 거리를 가득 메운 행렬에 응원을 하기도 하고 참가자들이 나눠주는 홍보물을 관심깊게 읽어보기도 했다.


시민, 대학생, 민주노총 등 1만 여명이 평택역 광장에서 열린 범국민대회에 참가했다.


'해고는 살인이다. 정리해고 철회하라.' 출산을 앞둔 쌍용자동차 가족대책위원회 어머니.


함께살자. 제발 좀.

거리 행진에 나선 범국민대회 참가자들.


거리 행진에 나선 범국민대회 참가자들.

한 시간 반 가량의 행진을 마치고 6 20분 경, 쌍용차 공장이 보이는 지점에 시위대가 도착하자, 경찰은 살수차와 차단막으로 공장으로 향하는 진입로를 봉쇄하고 대치했다. 시위대는 보도블럭을 걷어내어 투석전을 준비했다.

잠시 동안의 대치를 끝내고 투석전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경찰은 살수를 시작하며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는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도 여러 노동자가 연행되었다.

 

쌍용차 공장으로 진입하는 도로를 막고 있는 경찰. 도로교통법 위반.


살수를 시작하며 진압에 들어갔다.

공격을 시작하는 경찰. 가운데에 채증을 위한 캠코더가 보인다. 불법채증.


연행되는 노동자. 경찰은 시민의 혁대를 잡아 끄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시민이 일군 텃밭에 까지 뛰어들어가 시민을 연행하고 있다. 식량위기.


한참을 밀려난 시위대는 다시 한번 대오를 정비하고 투석전을 시작했으나 다시 한번 경찰에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시위대가 인근 아파트 쪽으로 달아났고 그들을 쫓아 경찰이 시민이 일궈놓은 텃밭을 가로질러 아파트 단지 내부로 진입하기도 했다.


다시 한번 대치상황, 대오를 정비하고 있는 시위대에게 경찰은 헬기를 동원해 최루액을 담은 비닐 봉지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스티로폼도 녹이는 그 최루액 말이다. 최루액이 떨어지자 모여있던 시위대는 일시적으로 그 자리를 피했다가 다시 모이기를 수 차례, 다시 한 번 경찰의 진압이 시작됐다.

 

텃밭을 가로질러 시위대를 쫓아가는 경찰.


인근 아파트로도 쫓아 들어갔다.


공중에서 최루액을 담은 봉지를 떨어뜨렸던 경찰 헬기.


최루액을 담은 비닐 봉지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다.


시위대가 무리지어 있는 곳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행히 몸을 피했다.


공중에서 경찰이 떨어뜨린 최루액을 담은 비닐 봉지를 촬영하고 있는 취재진.
냄새를 맡아보니 최루액이 아닌 물인 듯 했다. 최루액이 다 떨어졌을까?


또 다시 여러 참가자가 연행되었다. 연행 과정에서 노동자가 저항하자 경찰이 곤봉으로 위협을 가하는 장면도 목격되었다. (이는 모두 인권침해감시단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인근에 모여있던 시민들이 일부 흥분하여 경찰과 잠시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진압 과정에서 상처를 입어 호흡이 곤란해진 노동자도 목격되었다. 그는 취재진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물을 먹이려 하자 구토를 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모여들어 빨리 119를 불러라’, ‘너희들은 부모도 없느냐는 등 경찰을 향해 소리를 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한 경찰은 캠코더를 들이대고 촬영을 하고 있었고, 한 시민이 채증하지 마세요. 그거 불법이잖아요.’라며 얘기했지만 해당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을 계속했다. 시민과 경찰의 실랑이가 두어차례 벌어졌고, 이후 앰뷸런스가 도착하자 부상을 입은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인권침해감시단에서 한 사람이 동승하였다. 부상자를 앰뷸런스에 태우는 과정에서 기자를 왜 때리느냐라는 흥분된 목소리도 여러 차례 들렸다.

 

곤봉으로 연행되는 시민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권침해감시단에서 많은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시민들을 향해 직접 분사하고 있는 살수차.


연행하는 과정에서 주변 인도에 있던 시민들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진압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시민. 옆에 놓여있는 소화기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부상자에 대한 응급조치가 빨리 취해지지 않자 흥분한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그 자리에 캠코더를 들이미는 경찰.
(초상권 보호차원에서 경찰관 얼굴에 블러처리.)


동일한 경관이 부상을 입은 시민이 앰뷸런스에 태워지는 과정에 계속해서 촬영을 하고 있다. (역시 블러 처리)


법원 사거리까지 밀려나 대오를 정비하고 있던 시위대는 오후 8시에 즈음해, 쇠파이프를 든 일부 시위대가 다시 쌍용차 방향으로 행진하였으나 30분 뒤 다시 법원 사거리로 돌아왔다. 지도부가 다음 행보를 논의하는 동안 시위대는 법원 사거리에 늘어앉아 연좌시위에 돌입했다. 일부 대학생 참가자와 시민들이 밤이 늦어 돌아가자 마이크를 든 민주노총의 누군가가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 분위기인데라는 말을 했고, 이에 흥분한 참가자들이 말을 제대로 하라.’며 중앙으로 몰려들어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촬영을 시도했으나 제지당했다.)


한 시간 가량을 그렇게 보내고, 지도부에서 다시 한번 쌍용차 방면으로 가기로 결정이 된 듯, 쇠파이프와 죽봉으로 무장한 선봉을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대오의 상당부분이 빠져버렸고 약간의 내부 분란까지 겪은 상황에서 시위대는 더 이상 행진하지 못하고 SK 주유소 인근에서 10시에 해산했다.



Posted by Pavel
Juventus/History2009. 7. 28. 19:33

       Club's history


Before and after World War II


Juve win two Italian Cups. 1947, the Avvocato Giovanni Agnelli becomes Chairman.

 

득점 기계 Gabetto

  1935-36 시즌, 유베는 챔피언 Bologna에 승점 5점 뒤진 리그 5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미 유베는 골키퍼 Valinasso, 풀백 Foni,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깰 수 없는 Monti를 보유하고 있는 데에 더해, 이 시즌 20골을 넣은 수퍼 Gabetto가 등장했다.

  그 다음 시즌에도 5위를 했지만 Borel II가 18골, 어린 Gabetto가 17골을 넣었다. Amoretti와 Foni, Rava가 여전히 강력한 디펜스 트리오를 만들고 있었다. 비안코네리는 1937-38시즌, 다시 한번 리그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Ambrosiana Inter에 뒤진 2위로 시즌을 끝냈다. 하지만 이 시즌, 유베는 결승전에서 Torino를 꺾고 첫 번째 이탈리안 컵을 차지했다.

 

Parola의 등장

  1938-39 시즌, 유벤투스는 여전히 Depetrini, Foni, Gabetto와 같은 훌륭한 선수들이 있었지만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바로 다음 시즌에는, Ambrosiana Inter와 Bologna에 밀려 3위를 차지했다. 한가지 긍정적인 점은 아주 어린 중앙 수비수가 시즌 후반기에 데뷔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Carlo Parola였다. 1940-41 시즌, 팀은 다시 6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다음 해, AC Milan을 꺾고 두 번째 이탈리안 컵을 따냈다. 알바니아인 Lustha가 Gabetto와 함께 공격을 이끌었다. 이탈리아가 세계 제 2차 대전에 뛰어들면서 리그에게는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리그가 중단되지는 않았다. 당시 유벤투스는 늙기는 했지만 여전히 클래스를 유지하고 있는 Giuseppe Meazza를 데리고 있었다. 하지만 Gabetto가 Torino로 팀을 옮겨버렸다. 이 시즌 유벤투스는 Torino와 Livorno(놀랍게도!!!)에 밀려 3위를 차지했다.

 

전시(戰時)의 리그

  전쟁이 가장 심해졌던 시기에도 축구는 계속되었다.

  1944년, 유벤투스는 지역 토너먼트에 다른 두 팀과 함께 참가했다. 그 중에 한 팀은 당시 유벤투스의 회장인 Piero Dusio가 소유하고 있던 자동차 공장 Cisitalia였다. 유벤투스는 Sentimenti IV, Rava, Depetrini, Parola, Sentimenti III, Borel II가 뛰었고, Foni, Varglien II, 알바니아인 Lustha, Santacroce가 Cisitalia에서 플레이했다. 경기 중에 스탠드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토너먼트가 중단되었다.

 

Gianni Agnelli 회장과 Boniperti의 등장

  1945년 10월 14일, 마침내 리그가 다시 시작되었고, 곧장 더비 경기가 벌어졌다. Torino는 이미 'Grande Torino'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유베도 이미 강했고 2-1로 승리했다. 그 이후는 두 팀 간의 치열한 경쟁이었다. 하지만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Torino는 Livorno를 꺾었지만 유베는 Napoli를 상대로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타이틀은 Granata가 차지했다. 이 해 여름, 팀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1947년 7월 22일,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Avvocato' Gianni Agnelli가 회장이 되었다. (Avvocato는 the lawyer라는 뜻입니다.) 구단의 새 프론트가 맺은 첫 번째 중요한 계약도 1947년에 있었다. 그 계약은 Barengo의 꼬마, Giampiero Boniperti였다.(이때 그의 나이는 열 아홉이었습니다.) 유베는 이미 다른 포지션에 Parola와 Sentimenti IV라는 두 명의 스타 플레이어를 데리고 있었다. 그의 등장으로 드디어 팀이 그렇게 오랫동안 찾았던 센터 포워드가 합류하게 됐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어린 선수, 덩치는 작지만 기술이 뛰어났던 Muccinelli와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됐다. 1948년 여름, 유베는 덴마크 출신의 체격 조건이 좋은 포워드를 한 명 사왔다. 그의 이름은 John Hansen. 그는 아주 파워풀했고 헤딩 경합이 아주 좋았다.

 

HEADQUATERS

1933-43 Via Bogino 12

1943-47 Corso IV Novembre 151

 

GROUND

1933-90 Corso Sebastopoli Stadium


       Chairmen


 

1935-36 Enrico Craveri-Giovanni Mazzonis

  Enrico Craveri, 비안코네리 프론트였던 그는 Edoardo Agnelli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회장이 되었다. 그는 1908년부터 1912년까지 유벤투스의 선수였으며 나중에 Edoardo Agnelli의 오른팔이 되었던 Giovanni Mazzonis의 절친한 친구였다.

 

1936-41 Emilio de la Forest de Divonne

  토리노의 귀족이면서 파시스트 정권과 친분이 있었던 그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은 Edoardo Agnelli의 뒤를 이을 사람은 그만큼 명성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클럽의 생각을 채워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1941년까지 회장직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인 클럽 운영은 경험이 있었던 Craveri, Mazzonis, Remmert가 맡아서 했다.

 

1941-47 Piero Dusio

  그는 젊은 시절,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유벤투스에서 오른쪽 윙어를 했던 제법 괜찮은 축구선수였다. 은퇴한 뒤에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고 Cisitalia의 오너로서 전쟁이 벌어지던 기간 동안 유벤투스가 일정한 수입을 올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1947년, 그는 Giovanni Agnelli가 회장이 되도록 설득했다.

 

1947-54 Giovanni Agnelli

  스물 여섯에 불과했던 1947년 7월 22일, 그는 아버지, Edoardo와 똑같이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Giovanni가 회장이었던 기간도 클럽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는 John Hansen, Martino, Praest를 영입한 것 같은 좋은 계약들을 성사시켰다. 그 뿐 아니라 Viola, Bertuccelli, Piccinini와 같은 이탈리아의 어린 재능들에 집중하기도 했다. 그는 유베가 1950년과 52년에 타이틀을 차지했던 Great Juve를 만드는데 전력을 다했다. 'Avvocato'는 1954년 9월 18일, FIAT에서의 일에 더 집중하기 위해 회장에서 물러났다.



       Captains


 

Virginio Rosetta

Luis Monti

Mario Varglien II

Pietro Rava



       Coaches

 


Virginio Rosetta

  축구 선수로서도 전설이었던 그는 선수 겸 감독으로 커리어를 마쳤고 그 이후로는 3년 간(1936년부터 39년까지) 팀을 감독했다. 그는 축구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경험과 지식들을 잘 이용했다. 감독에서 물러난 뒤에는 클럽의 스카우터로 남았고 Parola와 Boniperti같은 젊은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Umberto Caligaris

  1938년 Brescia에서 풀백으로서의 경력을 마감한 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팀 동료였던 Rosetta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유베에 돌아왔다. 그는 좋은 감독이었지만 1940년, 예전에 함께 뛰었던 선수들과의 기념 경기 도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그때 마흔도 채 되지 않았다.

 

Federico Munerati

  그는 열심히 뛰었고, 기술도 있었고, 득점도 많았다. 그래서 1922년부터 33년까지, 11시즌 동안이나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였다. 그 이후에는 유스 팀 감독이 되었고 1940년에 퍼스트 팀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42년 이탈리안 컵을 따냈다.

 

Giovanni Ferrari

  이탈리아 국가대표로서 두 번의 월드컵 우승과 여덟 번의 리그 타이틀. (그 중 다섯 번은 유벤투스와 함께했다.) 포워드로서 그의 경력은 대단하다. 유벤투스에서 그는 자신의 화려한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1960년에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유베의 감독으로 있었던 동안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 한 시즌(1941-42) 만에 물러났다.

 

Felice Borel

  30년대, 유베에서 센터 포워드로 뛰면서 많은 득점을 했던 그는 1942년부터 46년까지의 암울했던 시기, 선수 겸 감독으로 있었다.

 

Renato Cesarini

  1930년부터 35년까지, 리그를 지배했던 5년 간, 그는 유베에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 그리고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서 감독이 되었다. 유베는 그를 잊지 않았고 그를 1946년부터 48년까지, 그리고 1959년, 이렇게 두 번이나 채용했다.

 

William Chalmers

  거드름을 피우기를 좋아했던 영국인인 그는 Cesarini의 자리를 1948년에 이어받았다. 그는 선수들이 호텔에 있든, 기차에 있든, 어디에 있는지는 관계없이 그들을 훈련시키는 변덕을 부렸다. 구단 프런트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이런 미친 짓에 익숙하지 않은 선수들도 그를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 시즌 뒤에 해고됐다.


사진과 텍스트의 출처는 Juventus.com 입니다.
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Posted by Pavel
Juventus/History2009. 7. 23. 16:28
       Club's History

The dream team becomes "Italy's girlfriend"

5회 연속 우승
  Ferrari, Vecchina, Varglien II가 팀에 왔다.
  이 시기는 유벤투스가 1930년부터 35년까지 다섯 번 연속 우승을 차지하면서 '이탈리아의 여자친구'가 된 때이다. 아녤리와 그의 대리인 Baron Giovanni Mazzonis di Pralafera가 경영한 시기, 팀은 점차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29-30 시즌에 시작된, 그룹 하나로 구성된 리그(Serie A)는 축구 선수들에게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그 시즌, 이미 스타였던 Varglien I과 Caligaris에 더해서 Mumo Orsi와 Renato Cesarini가 팀에 합류했다. 다음 해에는 포워드 Giovanni Ferrari, 센터 포워드 Vecchina와 하프백 Varglien II가 들어왔다. 이미 전설적인 수비 트리오 (Combi-Rosetta-Caligaris)를 보유하고 있던 유베는, 당시 리그를 지배하고 있던 Ambrosiana Inter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가공할 공격진 (Munerati-Cesarini-Vecchina-Ferrari-Orsi)을 갖추게 됐다.
  유베는 곧 리그의 정점에 서게 됐다. 봄에 반짝했던 로마에게 일격(1931년 3월 15일, 로마에서 0-5로 패)을 당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폼을 계속 유지, 토리노에서 복수를 해주기도 했다. 인터 밀란에게도 승리를 거두면서 우승을 못 박았다.

수비의 거인, Monti
  다음 시즌을 위해서 Carcano에게 필요한 것은 거의 없었다. 새롭게 사인을 한 선수는 경험많은 하프백 Lisito Monti 그의 곧은 성격과 굳은 의지로 Monti는 자신이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수비수임을 보여주었다. 시즌 초기에는 모든 팀들이 유베를 꺾으려고만 해서 작은 문제들이 몇 가지 나타났다. 하지만 그 문제들은 곧 해결되었고 선수들은 다시 폼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했다. Orsi와 그 동료들이 Ambrosiana Inter를 박살냈던 1932년 1월 17일 경기가 기억할 만하다. 1932년 3월 6일, 로마를 7-1로 꺾은 뒤부터는 탄탄대로였다.
  5월 1일, Corso Marsiglia 경기장에서 볼로냐를 3-2로 꺾었다. 이 경기로 비안코네리는 2연속 스쿠데토를 차지했다. Orsi는 20골로 득점 1위를 차지했고 Ferrari, Vecchina, Munerati도 각각 17골, 15골 14골로 이름을 올렸다.

Borel II와 Bertolini
  1932년 여름, 유벤투스는 하프백 Bertolini와 윙어 Sernagiotto를 데려왔다. 하지만 새로운 선수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선수는 유스팀에서 올라왔다. 젊은 포워드 Felice Placido "Farfallino" Borel이었다. (Farfallino는 나비 넥타이라는 뜻이라고 하는군요.) 그는 늘 안쪽 포워드(inside forward)로 플레이했지만 Vecchina가 부상당했을 때에는 센터 포워드로 뛰기도 했다.
  1932-33 시즌의 중요한 골들은 거의 Borel이 득점했다. 유베는 승점 54점으로 Ambrosiana에게 8점 앞선 1위를 차지했다. 28경기에서 29골을 넣은 Borel에게는 최고의 시즌이었다.

새 경기장과 더 많은 스쿠데토
  4회 연속 스쿠데토를 차지한 34년에도 Borel의 활약은 계속되었고, 그는 31골을 넣었다. 유난히 좋은 시즌을 보냈던 Ambrosiana에게 승점 4점을 앞섰다. 유벤투스도 그들을 꺾지는 못했다는 사실이 이번 스쿠데토를 더욱 값지게 했다. 1934년 2월부터 팀은 새로운 스타디움 Stadio Comunale에서 경기를 할 수 있게 됐다.
  유베는 35년에도 스쿠데토를 차지해, 5연속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 시즌에는 많은 선수들이 국가 대표팀에서 뛰고 싶다는 욕심에 팀을 떠났다. (1934년은 이탈리아 월드컵이 있었고, 이탈리아는 우승으로 줄 리메 컵을 차지했습니다.) Combi는 이미 은퇴를 결정, 5회 연속 우승의 마지막 시즌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젊은 피 Foni와 Serantoni가 팀과 함께 했습니다.

HEADQUARTERS
1922-33 Corso Marsiglia
1933-43 Via Bogino 12

GROUND
1922-33 Corso Marsiglia
1933-90 Stadio C.so Sebastopoli


       Chairmen


Edoardo Agnelli (1892 - 1935)


       Captains


1930-35 Viri Rosetta


       Coaches


1930-34 Carlo Carcano
  Masnago에서 1891년 출생. 센터 하프백으로 Alessandria에서 경력을 쌓았고 이탈리아 국가대표로도 뛰었다. 그는 감독을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상태에서 유벤투스를 맡았다. 그는 팀에 몸담고 있는 많은 스타선수들 간의 경쟁과 갈등을 조절하는데 뛰어났다. 그는 '전설적인 5년', 즉 31, 32, 33, 34년의 우승과 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는 1934년 가을에 갑자기 교체되었다. 그래서 다섯 번째 연속 우승은 20년대, 유벤투스의 중요한 선수였던 Carlo Bigatto가 감독이 되어 대신했다.

1934-35 Carlo Carcano, from 1934.12.16  Carlo Bigatto-Benedetto Gola

사진과 텍스트의 출처는 Juventus.com 입니다.
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Posted by Pavel
Juventus/History2009. 7. 19. 03:00
       Club's History

Twenties and the second League title

1923: Edoardo Agnelli is Chairman. 1925, with Hirzer, the Club win their second title.

Edoardo Agnelli 회장
  1923년 7월 24일. 피아트 설립자의 아들 Edoardo Agnelli가 회장에 선출되었다.
  유벤투스는 Corso Marsiglia에 벽돌로 지은 클럽 전용 경기장을 갖고 있었다. 팀은 점점 강해졌다. 주목받고 있던 풀백 Viri Rosetta가 Vercelli에서 유벤투스로 왔다. Combi는 이미 오른쪽 윙어 Munerai, Grabbi, Bigatto와 기술이 좋은 센터 포워드 (곧 영화배우가 되는) Pastore와 함께 팀의 일부분이 되었다. 유벤투스 역사상 최초의 감독은 헝가리에서 온 Jeno Karoly였다.

두번째 스쿠데토
  Karoly는 선수, 팬들을 포함한 클럽의 모든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팀의 진짜 에이스는 또 다른 헝가리인, 레프트 포워드 Hirzer였다. 유벤투스는 Northern League의 B 그룹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결승전에서는 최고의 팀이었던 볼로냐를 만났다. 1926년 7월 11일, 볼로냐에서의 첫 경기는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리고 7월 25일에 토리노에서의 두 번째 경기도 득점 없이 비겼다. 스쿠데토의 향방을 결정짓기 위해서는 또 한번의 경기가 필요했다.

8월 2일, Edoardo Agnelli의 유베는 밀란에서의 경기를 2-1 승리로 장식하면서 스쿠데토를 따냈다. 이날의 라인업(Combi, Rosetta, Allemandi, Grabbi, Viola, Bigatto, Munerati, Vojak, Pastore, Hirzer, Torriani)은 역사에 길이 남았다. 이 경기를 며칠 앞두고 Karoly 감독이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 직후, 유베는 중남부 그룹의 우승팀, Alba Roma를 홈 경기 7-1, 원정 경기 5-0으로 발라버렸다.

Hirzer에서 Orsi까지
  그 다음 시즌도 언제나처럼 멋진 승리들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준결승 그룹에서 토리노가 우승을 차지해 버리는 약간의 불확정 요소가 생겼다. 게다가 리그 규정이 바뀌면서, 팀은 최고의 선수 Hirzer를 잃었다. 그를 대신해서 나이가 좀 있었던 Cevenini III가 투입되었다. 그는 인터 밀란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었지만 유벤투스에서 그의 활약은, 팀이 볼로냐와 인터 밀란을 따라잡을 만큼은 못 됐다. 그리고 20년대의 끝자락에 Serie A가 만들어졌다. 이제 축구는 엄청난 팬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유벤투스도 다시 한 번 정상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Caligaris, Cesarini, Raimundo Orsi와 같은 훌륭한 선수들이 왔다. 특히 Orsi는 이탈리아 태생이지만 아르헨티나 유니폼을 입고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관중들을 열광시키는 플레이를 보여주기도 했다.

HEADQUARTERS
1922-33 Corso Marsiglia

GROUND
1922-33 Corso Marsiglia


       Chairmen


Edoardo Agnelli (1892 - 1935)
  Verona에서 태어난, 피아트 설립자의 아들 Edoardo는 1923년 7월 24일 화요일에 사람들의 환호 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Hurrà Juventus"는 그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매우 영리하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의 아버지인 Giovanni Agnelli 의원의 경영을 도우면서 사회, 삶, 일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했다. 진정한 스포츠 매니아, 실력있는 드라이버, 토리노 마상경주회(馬上競走會)회장, 피아트 스포츠 그룹 명예회장. 그는 우리 클럽에 자신의 경영 철학을 들여왔고 클럽의 이름을 이탈리아 스포츠 역사에 길이 빛날 이름으로 만들 것이다.>
  그의 경영 체제 하에서 팀은 환골탈태했다. 유벤투스의 첫 번째 외국인 스타 Ferenc Hirzer와 첫 번째 감독 Jeno Karoly, 두 헝가리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유벤투스는 그 이름을 유럽 스포츠 무대에 알렸다. Agnelli의 재임 기간 동안 팀은 여섯 번 우승했고 그 중에 1930년부터 35년까지 5회 연속 우승 기록도 있다. 그는 비극적인 사고로 사망했다. 유명한 조종사인 Arturo Ferrarin이 조종하는 비행기를 타고 제노아의 항구에 접근을 시도하던 중에 일어난 충돌 사고였다. 1935년 7월 13일의 일이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 비행기는 수상비행기였고 착륙을 시도하던 중, 물에 떠있던 통나무에 비행기가 충돌, 아녤리의 머리가 계속 돌고 있었던 프로펠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Edoardo_Agnelli_(industrialist))


       Captains


1922-29 Carlo Bigatto


       Coaches


1923-26 Jeno Karoly
  유벤투스 역사에 등장한 첫 번째 감독. 1923년, Agnelli 회장이 취임 후 처음으로 한 일이 바로 그를 감독으로 채용한 것이었다. 그 당시 유럽 축구를 주름잡던 헝가리 축구에서 많은 것을 배운 그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다시 한 번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는 1903, 1905년 헝가리 리그 득점왕을 했습니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Jenő_Károly) 그의 능력에 비춰보아 그가 받던 봉급도 적절했다. "2,500 리라 선불에 팀이 그룹에서 우승할 경우 10,000 리라의 수당이 지급되었다. 1주일의 유급휴가도 있었다. Karoly가 할 일은, 팀 훈련 계획을 짜고, 선수들을 가르치고 완전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세 시즌을 거치면서 완전히 조련된 팀을 만들어 냈고 그 팀은 1925/26 시즌에 스쿠데토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르친 선수들이 만들어 낼 영광을 함께 누리지 못했다. 볼로냐와의 결승전을 불과 몇 일 앞두고 심장마비로 죽었기 때문이다.

1926-28 Joszef Viola (József Viola 또는 Giuseppe Viola 라고도 씀)
  1896년, 헝가리 태생인 Viola는 Spezia의 중앙 하프백으로 이탈리아에 처음 발을 디뎠고 1924년에 유벤투스로 팀을 옮겼다. 그는 1926년에 스쿠데토를 차지했고 Karoly의 요절로 그의 자리를 대신해 감독이 되었다.

1928-30 George Ajtken
  Agnelli는 1928년, 이 스코틀랜드 인을 채용했다. 'System' (Formation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의 창시자, Chapman의 추종자였던 그는 이탈리아에서 축구를, 체력이라는 측면에서 고려하고 그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첫 번째 감독이었다. 그래서 클럽에서 오랫동안 뛰었고, 또한 이미 팀의 많은 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기술이 뛰어난 선수들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감독 자리는 1930년, Carlo Carcano로 교체되었다.

사진과 텍스트의 출처는 Juventus.com 입니다.
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Posted by Pavel
Juventus/History2009. 7. 16. 15:45
       Club's History

Before and after World War I



힘든 시간들

  첫 번째 스쿠데토 이후에는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회장이었던 Dick이 클럽을 떠났고 실력 있는 외국인 선수들이 그를 따라 갔다. 이런 고난들은 유벤투스가 스스로의 목표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했다. 팀은 새롭게 떠오르는 강 팀 Pro Vercelli와, 상위권을 목표로 하는 또 다른 팀 Casale를 상대하게 됐다. 1913/14 시즌이 끝난 뒤에는 세계 제 1차 대전이 일어났다. 그 다음 시즌은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가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중단되었다.

Hurrà Juventus의 창간

  다수의 선수와 클럽의 직원들이 전쟁터로 갔고 그 중에 몇몇은 돌아오지 못했다. 클럽의 소식을 계속 전달하기 위해서 1915년 6월 10일, Hurrà Juventus가 Corradino Corradini를 편집장으로 하여 창간되었다. "승리는 믿음을 가진, 강한 자의 것이다"라는 모토가 표지에 실렸다.
  제 1차 대전은 1918년 11월에 끝났다. 유벤투스의 창립자들 중 몇 명이 전쟁터에서 죽었지만 승리를 향한 집념은 꺾이지 않았다. 1919년 10월 12일, 팀은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곧 이탈리아 국가대표가 되는 골키퍼 Giacone (유벤투스 소속으로 국가대표가 된 선수는 그가 처음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곧 국가대표가 될 두 풀백 Novo, Bruna (이 둘은 Rosetta-Caligaris 에서 Foni-Rava로 이어진 최강 수비수 콤비의 원형을 보여주었다.)가 팀과 함께 했다. 또한 Bona와 Giriodi의 결정력에 거는 기대도 컸다. 이 모든 것들은 1920년 3월 7일에 Casale를 꺾은 경기나 North Group 결승전에서 Genoa를 꺾은 5월 16일 경기 (특히 이 날 Bona는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처럼 좋은 성적을 내는데 충분했다. 하지만 우승을 하기에는 충분치 못했다. 우승은 Internazionale에게 돌아갔다.
(하여튼 인터 밀란은-_-;;)

Combi의 등장

  사람들은 이제 축구를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포터들의 응원이 항상 팀의 성적과 일치하지는 않았다. 1921년, 팀은 선두 그룹에서 뒤처지게 됐고, 1922년과 23년에는 Northern Group에서 조차도 성적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변하게 마련이다. 원래는 선수였지만 건강 상의 이유로 클럽 직원이 된 Marchi 2세가 엄청난 발견을 했다. 유스 경기를 보던 그는 젊은 골키퍼에게 반해버렸다. 그 선수의 이름은 Giampiero Combi. 1923년, 그는 18세의 나이로 A팀의 주전이 돼 있었다.

HEADQUARTERS:
1906 Via Donati 1.
1919-21 Via Carlo Alberto 43.
1921-22 Via Botero 16.

GROUND
1906-08 Piazza d'Armi (Corso Vinzaglio side)
1908-22 Corso Sebastopoli


       Chairmen



1907-10 Carlo Vittorio Varetti
  클럽 창립자 중 한 명으로, 1905년 우승팀의 스트라이커로 뛰었고 1907년에 회장이 되었다. 팀원들이 직접 만들었던, 클럽 내 신문의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경기 티켓을 파는 것 같은 실질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1911-12 Attilio Ubertalli
  그는 Varetti의 뒤를 이어 1911년과 1912년, 2년 동안 회장을 맡았다. 그 기간 동안은 승리가 없었다.

1913-15 Giuseppe Hess
  스위스 출신으로 유벤투스의 사상 첫 경기에 풀백으로 출전하기도 했던 그는 "Bino"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는 1905년 리저브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1912년까지 선수로 뛰고는 곧바로 Ubertalli의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다.

1915-18 facenti funzione Gioacchino Armano - Fernando Nizza - Sandro Zimbelli

1919-20 Corrado Corradini
  교수이면서 시인이었던 그는 1915년에 전시(戰時) 유벤투스의 팬들에게 보내는 "Hurrà Juventus"를 창간했다. 그는 1919년 회장에 선출되어 1년 동안 그 일을 맡았다. 그는 이미 많이 늙었기 때문에 1923년에 죽었다.

1920-23 Gino Olivetti
  변호사였던 그는 창립자들의 친구였고 동년배였다. 그의 재직 기간은 유벤투스 만의 스타디움을 건설하는 것고 뗄 수 없다. Olivetti의 친구 Surveyor Manateri가 Corso Marsiglia에 "Juventus Field"를 세웠고 Olivetti는 1923년 왕자, 시 관료들과 함께 스타디움을 공개했다.

사진과 텍스트의 출처는 Juventus.com 입니다.
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Posted by Pavel
Juventus/History2009. 7. 12. 22:10
Club's History

From the beginnings to the first Scudetto

1898 ~ 1905: from the first matches to the Italian title

핑크색 유니폼

  드디어 유벤투스가 경기를 치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Enrico Canfari의 기록이다. "FC Torinese가 우리에게 초청경기를 제의했다. 사실 우리는 정규 선수들을 상대로 경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우리의 첫 경기는 대 참사로 끝났다. 하지만 공을 다루는 기술도 많이 배울 수 있었고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첫 인상을 준 것 같았다. 열한 명을 수 있을 만큼 팀을 정비한 뒤에 우리는 다른 팀의 도전을 받거나 다른 팀에게 도전하기 시작했다. 토너먼트에 나갈 만큼 경험을 쌓았을 때 우리는 연고지를 토리노로 정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유니폼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면, 플란넬, 모직물 중에 어떤 걸로 할지를 정하는 건 힘들었다. 결국에는 1902년까지 입었던 얇은 핑크색 면 유니폼을 택했다. 그 이후로는 색이 바래져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1988년에 팀은 이름은 Juventus Football Club으로 바꾸었다. 1900년부터 클럽은 리그의 일원이 되었다. 첫 번째 공식 경기는 3월 11일, FC Torinese에게 패했던 경기였다. 1901년, 유벤투스는 준결승에 올랐고, 1903년과 1904년에는 결승전에세 Genoa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탈리안 챔피언

  1905년은 Bianconeri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특별한 해였다.
  검은 색과 흰 색은 Nottingham에서 들여온 색깔이었다. Durante가 골키퍼로, Armano와 Mazzia가 풀백으로, Watly, Goccione, Dimenti가 하프백으로, Barberis, Varetti, Forlano, Squire, Donna가 전방에서 뛰었다. Piedmont group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그들은 밀라노 사람들을 두 번 이기고 제노아와는 무승부를 거뒀다. 하지만 제노아는 밀란에게 승점 1점 밖에 따내지 못했다. 유벤투스가 이탈리아 챔피언이 된 것이다. 아직 스쿠데토는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당시 축구 협회는 우승 접시를 주었다.
  회장(실질적으로는 스폰서)은 Alfred Dick이 맡고 있었다. 팀은 그의 직물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외국인 선수들 덕분에 강해졌다. 1906년에도 우승에 아주 가까웠다. 하지만 선수들이 밀란과의 결승전에 나타나지 않았다. 중립지역이 아닌 밀라노에서 결승전이 치러지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클럽과 마찰을 빚었고 Dick은 자기와 친했던 선수들을 데리고 Torino를 만들기 위해서 팀을 떠나버렸다.

HEADQUARTERS
1898 Via Montevecchio
1899 Via Piazzi 4
1902 Via Gazometro 14
1904 Via Pastrengo

GROUND
1898 - 1904 Piazza d'Armi (Corso Vinzaglio side)
1904 - 06 Umberto I Velodrome, Corso Re Umberto


Chairmen

1897 Eugenio Canfari

1898 - 1901 Enrico Canfari (1877 - 1915)
  그는 열정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첫 번째 경기를 주선했고 클럽의 역사를 기록했다. 처음에는 센터포워드로 뛰었지만 곧 팀 동료들을 위해 심판으로 나왔다. 화학 학위를 마친 다음 그는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고, 영국에서 축구 규칙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그는 후에 자원 입대하여 1차 세계 대전의 초창기에 Isonzo 전투에서 전사했다.

1901 - 02 Carlo Favale
  Canfari 형제의 친구였다. 그는 Enrico의 자리를 잠깐 동안 대신했지만 별로 특별한 일은 없었다.

1903 - 04 Giacomo Parvopassu
  그는 Canfari 형제의 모임에 들어갈 때에 이미 유명한 변호사였다. 그는 팀 창립자들에게 행정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05 - 06 Alfredo Dick
  그는 직물 산업에 종사하는 스위스인 사업가였다. 그리고 클럽의 첫 번째 공식 스폰서였다. 그는 스위스와 스코틀랜드에서 온 노동자들 중 축구를 했던 사람들이 클럽에 가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들은 마냥 어리기만 했던 팀에 경험이라는 것을 불어넣었다. 그런 이유로, A팀과 리저브 팀, 모두 우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권위주의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창립자들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 Federico가 경기에 뛸 수 있기를 바랐지만 실력이 별로인 사람을 라인업에 넣을 수는 없었다. 여기에 화가 난 Dick은 팀을 떠나버렸다. 그는 곧장 Torino를 만들어 자신이 클럽에 가입시켰던 노동자들을 모조리 옮겨버렸다.

사진과 텍스트의 출처는 Juventus.com 입니다.
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Posted by Pavel
Juventus/History2009. 7. 3. 17:57
Club's History

The Origin

November the 1st, 1897: on a bench a dream is born...

The Bench

  모든 전설은 그 시작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전설은 1897년 11월 1일, Corso Re Umberto의 벤치에서 시작되었다. Liceo D'Azeglio에서 온 아이들이 축구 클럽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들은 재미있으면서도 건강에 도움이 되는 놀이를 찾는 아이들에 불과했다.
  첫 번째 경기는 Piazza d'Armi에서 열렸다. 사실 이 곳은 육상과 승마를 위한 큰 공원이었는데 그들도 여기를 쓰기로 했던 것이다. 팀의 창립자 중 한명인 Enrico Canfari는 그때를 이렇게 기록했다.
  "1897년에 우리는 괜찮은 클럽을 한번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유벤투스의 진짜 시작이다. 좀 궁색하긴 하다. 첫 번째 모임이 열렸던 Corso Re Umberto 42번지, 그러니까 우리 Canfari 형제의 작업장은 진짜 우중충했으니까. 15명이 모였고, 그 중에서 제일 연장자는 열 일곱살, 나머지는 전부 열 다섯도 채 안됐다. 지금은 별 것도 아닌 문제겠지만 그때는 HQ를 찾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우리는 장소를 물색했고 방이 네 개에 마당과 다락방이 있는 집을 찾아냈다. 게다가 거기엔 마실 수 있는 물이 나오는 수도도 있었다."

첫 번째 회장, Canfari

  Canfari는 그 이후로 팀의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했다. "드디어 회의가 열렸지만 이름을 결정하는 건 힘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라틴어를 싫어했고, 다른 사람들은 반대였으니까. 중간에는 한 줌밖에 안 되는 중재파가 있었다.
  'Società Via Fort', 'Società sportiva Massimo D'Azeglio', 'Sport Club Juventus' 이렇게 세 개의 이름이 후보로 올라왔다. 세 번째 후보가 가장 로비를 덜 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선택됐다. 이렇게 클럽의 이름은 Sport Club Juventus가 되었다."
  클럽의 기원에 대해 많은 것을 기록해 둔 Enrico Canfari의 동생, Eugenio Canfari가 초대 회장이 되었다. 곧 새로운 HQ가 필요하게 되었고 Crocetta 구역의 Via Piazzi 4번지로 HQ가 이전하게 되었다.


Chairmen

Eugenio Canfari (1878-1962)
  제노아에서 태어난 그는 Corso Re Umberto 42번지에 있는 Canfari 집안의 자전거 공방(工房)을 클럽의 HQ로 내놓았다. 창립자들은 사의(謝意)를 표하고 싶어했고 Eugenio의 형, Enrico의 제의로 이어진 투표를 통해 그가 회장이 되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회장에서 물러나 자동차 제작에 열을 올렸다. 1902년 Taurinia를 창립했고 그 스스로는 카 레이서가 되었다.

사진과 텍스트의 출처는 Juventus.com 입니다.
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Posted by Pavel